크게보기 작게보기
페이스북
신천지 40년의 실상 (1)
현대종교 | 임웅기 목사
2024년 05월 17일 09시 00분 입력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대표 이만희, 신천지) 창립 40주년 기념행사가 3월 14일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고성리 평화의 궁전(신천지 평화연수원)에서 열렸다.

이 행사가 갖는 큰 의미는 ‘2~3년 이내에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 역사는 완성된다’, ‘144,000명의 순교자(영)와 144,000명의 신천지 신도(육)가 합일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라는 이만희 총회장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은 신천기 역사 41년이다. 그런데도 요한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열지 못하고 창립 기념 행사만 40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신천지 주장이 허구라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바탕으로 이 글은 신천지 41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그 속에 나타난 권력과 리더십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떤 권력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보여준 리더십의 한계와 그 이유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1. 장막성전의 역사

1984년 3월 14일 신천지를 창립한 이만희 총회장의 거짓 주장은 꼭 과천 청계산에 있었던 장막성전과 연결된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경험과 목격담이라고 하면서 1994년 『종교 세계의 관심사』(1994년)를 발표했다.​1)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 나오는 배도, 멸망, 구원의 사건을 직접 듣고 눈으로 본 목격자라고 주장하는데 알고 보면 거짓이다. 그가 주장하는 장막성전에서 배도, 멸망, 구원 사건 자체가 없었으며 그의 주장은 성경 구절과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것이고 잘못된 주장으로 오류가 많다.

이 책을 보면 1965년 말 호생기도원의 원장 김종규(본명 김용기)의 성비위를 알게 된 8명의 사람이​2) 이탈해 1966년 2월 17일 과천 하리(삼거리) 임마누엘 왕 유인구 집에 모여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후 4월 4일 청계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장막) 여호와의 성신으로부터 100일 동안 양육을 받고 언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만희가 향적산 국사봉에서 책 두 권을 계시 받아 기록했다고 할 때 40일 동안 묵었던 구룡정사 차소녀 무당집(출처:임웅기 목사)

 

언약서 내용을 보면 ‘백성들은 7천사에게 순종하고 7천사는 임마누엘 왕 유인구에게 순종하고 유인구는 여호와 성신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언약과 선지 사도들로 전한 약속을 믿고 지키면 3년(혹은 3년 6개월) 안에 모든 역사가 완성된다’라는 음성을 듣고 순종의 서약으로 동맥을 자른 후 링거 두 병에 피를 담아 언약을 맺었다고 한다.

마지막 시대에 추수꾼의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8명은 세상이 3차 대전으로 불타고 종말이 올 때 청계산 밀실에서 살아남아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시한부 종말설을 가지고 하산해 1966년 6월 1일부터 24일까지 장막성전을 세우게 된다.​3) 1966년 7월부터 단상에 언약궤를 놔두고 임마누엘 왕이 7명의 천사와 함께 예배를 인도하기 시작했고 유인구 임마누엘 왕이 직접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67년 7월 임마누엘 왕 유인구의 아들 삼손 유재열이 이 언약을 깨뜨리고 아버지를 쫓아낸 후 장막성전을 탈취하였는데 이 사건을 두고 신천지 이만희는 ‘배도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1969년 11월 30일에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나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주장은 공염불에 그쳤다.

시간이 지나도 세상의 종말이나 멸망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재열은 계속 자신을 믿고 따를 것을 주장했으며 1969년 말 착공해 1973년 새 장막성전을 건축한 후 명칭을 ‘대한기독교 장막성전’, 약칭으로 ‘장막성전’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다 1980년 5공화국이 들어섰고 전두환 정부는 초기에 국제종교문제연구소 탁명환 소장에게 ‘사이비종교 정화운동’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탁명환 소장에 의해 이단으로 분류된 장막성전은 이단으로 지목받지 않기 위해 오평호 목사의 주선으로 장로교와 결탁했다는 것이다.

원래 천주교 수도회 소속 신부였던 오평호씨는 개종하여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유재열씨에게 전도되어 장막성전에 입교하여 신임을 얻어 전도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후에 탁명환 소장과 하나가 되어 장막성전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삭중앙교회’로 만들고 장막성전 빚을 갚아주는 조건으로 신도 50명을 장로교 신학교에 입적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재열은 이방 교권에 눌려 1980년 3월 14일에 천사 종들을 다 자르고 장로교 출신 목사였던 오평호씨를 당회장으로 세워 장막성전 단상에서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 9월에 당회장 오평호씨의 뜻을 따라 단상에서 물러났고, 권력을 장악한 오 목사는 언약의 장소인 초막을 헐고 모든 재직을 물러나게 했으며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출교시켰다. 그리고 장로교법으로 여자 3명을 포함해 장로 10명을 선출하고 제직을 새로 구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 1981년 9월 20일 14시에 장막성전 17명의 전도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이삭중앙교회라고 이방 간판으로 바뀐 장막성전에서 기독교청지기교육원 소속 목자에게 안수 한 번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청지기교육원 목사들은 장막성전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단사이비 정화 운동이라는 명목하에 장막성전에 들어와 신학교 4년이나 6년을 배워도 목사가 되기 힘든데 장막성전의 전도사들을 안수 한 번으로 이방 목자로 만들고 지교회까지 이방교회 간판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막성전은 모든 지교회를 포함해 창립 14년 만에 이방 목자들에게 침노를 받아 멸망을 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신천지는 이 사건을 ‘멸망의 사건’이라고 가르치며 멸망자로 오평호와 기독교청지기교육원 목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다.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은 배도와 멸망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제 자신을 통해 구원의 사건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이 시대의 ‘구원자’, ‘이긴자’라고 외치고 있다.

이 괴변에 미혹된 많은 사람이 이만희를 따라가면 죽지 않고 영생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 가정불화, 학업·직장·사회생활·결혼·출산 포기, 가출, 이혼을 선택하면서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2.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의 이단 신앙의 역사

자칭 이 시대의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이만희 총회장은 1931년 9월 15일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 마을에서 10남 1녀 중 6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57년부터 1967년까지 약 10년 동안 부천 소사에 있는 신앙촌(현재 천부교)에서 박태선 교주를 영부(靈夫)로 믿으며 전도관 신앙생활을 했다.

부인 유천순은 동향 사람으로 현리 읍내에 살았고 소개받아 결혼했으며 신앙촌에서도 함께 생활했다. 그러다 서울로 건축 미장일을 하러 다니던 중 장막성전 유재열의 설교를 듣고 탄복하면서 청계산에 있는 장막성전으로 신앙 교적을 옮기게 된다. 장막성전에는 이미 전도관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와 있었고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천도교에서 천지개벽이 일어나면 향적산이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의미로 세운 비석을 도용한 이만희(출처:임웅기 목사)

 

유재열 교주와 신천지 실상 인물로 알려진 김대원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이만희 총회장은 1968년에 들어왔고 그곳에서 다른 역군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9년 11월 30일이 지나도 유재열이 말했던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았다.

점차 실망감을 느끼던 차에 통일교 출신인 목영득이 장막성전에 나타나 자신이 실로의 실상이라고 주장했다(창49:10). 그러나 모세 장로 신종환이 실로가 나타나면 하늘의 계시가 다시 나타나야 하는데 없는 것을 보니 거짓이라고 하면서 그를 쫓아냈다.

후에 목영득이 충북 보은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이만희 총회장과 장막성전 신도들이 그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막성전에서 이만희 총회장에게 출교 명령을 내렸고 이 결정에 반발한 이만희 총회장과 장막성전은 서로 다투게 되었다.​4)

1971년에 있었던 사건 자료를 보면 장막성전 사람들이 이만희 총회장을 폭행했고 이만희 총회장은 자신을 폭행한 사람들을 고발했다. 그중에는 7천사 중 하나로 알려진 미가엘도 있고 유재열 교주도 그때 이만희 총회장과 서로 고소 고발을 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신천지 이만희 교주는 신도들에게 자신은 초림 때 예수님처럼 말씀을 증거하다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으며 장막성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하면서, 초림 때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고십자가에 죽임을 당했으나 아무런 저항 없이 침묵했듯이, 자신도 그런 고난과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예수님과 똑같이 행동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다.

1971년경 장막성전에서 출교당한 후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자칭 실로 목영득이 서울 강북구 수유리 지역에 제8일 교회를 세웠을 때 이만희 총회장이 올라가 6번째 아들로 입적했다고 한다.​5)

그 이후에 다시 고향으로 낙향했는데 1978년경 장막성전에서 솔로몬 영명으로 활동했던 백만봉은 장막성전이 말씀으로 이뤘으나 자신은 요한계시록의 실상을 다 이룬다고 주장하면서 1977년에 재창조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자신은 영부(하나님), 심판자, 재림 예수라고 자처하면서 전해인(본명 전해룡), 조영환, 갈렙 심재권을 보내 이만희 총회장을 서울로 데리고 왔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만희 총회장은 11번째 아들, 그의 동생 이만춘은 12번째 아들이라고 불렀다.​6)

1980년 3월 14일 백만봉 교주는 청계산에 떠오르는 해를 멈추게 하면 자신을 믿고 아니면 다 각자 길로 헤어지자고 주장했으나 허풍으로 끝났다. 청계산에서 백만봉은 그곳에 모인 신도들에게 사과했고 화가 난 이만희, 홍종효는 백만봉과 크게 다툰 후 헤어졌다. 그날 이후 이만희, 홍종효, 김대원 등이 인덕원에서 모임을 시작한 것이 신천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신천지가 주장하는 배도, 멸망, 구원의 사건을 살펴보았다. 신천지는 초림 때 세례요한 장막의 배도, 멸망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초림과 재림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림의 역사는 멸망자라고 부르는 서기관·바리새인, 대제사장 등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싸움이라면 재림 때는 배도자이며 세례요한 격 목자로 부르는 유재열 장막성전과 이만희 총회장과의 싸움이다.

초림 때 이방 로마군대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은 당시 선민사상으로 찌든 멸망자 종교지도자들의 소유였고 재림 때 선민이라고 부르는 장막성전은 배도자 유재열과 그 일당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신천지의 초림과 재림의 역사가 같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장막성전의 멸망도 신천지의 주장과는 다르다.

장막성전의 파괴는 첫째, 내부 고발로 인한 유재열 교주의 구속이 결정타였다. 1974년 7월 25일에 박태선 신앙촌 출신이며 장막성전 신도였던 홍종효는 자신이 운영하던 바구니 공장을 강탈했다는 혐의를 들어 유재열 교주와 임종대 집사를 처벌해 달라고 서울 영등포지청 조모 검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로 인해 유재열 교주는 1975년 9월 6일에 구속되고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선고를 받고 1년 만에 교도소에서 풀려나오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재열 교주는 장막성전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둘째, 1977년 1월 10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과천에 남서울대공원 계획을 발표한다. 서울시는 1978년 9월에 막계 1·2리 남쪽에 원주민 이주단지 조성계획을 세우고 10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79년 9월 17일 완공했다. 당시 막계 2리 마을에 거주하는 장막성전 신도 수는 400가구가 넘었고 여기에 있던 천주교 수녀원, 불교 사찰 등도 모두 이주계획에 포함시키고 농가는 1단지에, 비농가는 2단지에 수용을 결정한다.

장막성전은 2단지로 이주하고 1399평의 대지 위에 421평의 새 성전을 분양받아 건축을 새로 했다. 지금의 과천 문원동 115의 354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과천소망교회의 전신이 장막성전이다.

신천지 주장처럼 오평호 목사와 기독교청지기교육원 목자들이 합세하여 1980년 3월에 당회장이 되고 9월에 제직이 총사퇴하고 장막성전을 완전히 장악해 무너뜨리고 지금의 문원동으로 이사 간 것이 아니다. 훨씬 이전에 남서울대공원 조성계획으로 인해 이주해야 했고 보상절차가 진행된 상태였으며 협상이 끝난 사람들은 이미 이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 장미의 언덕이 있던 장막성전이 무너진 것을 오평호 목사와 기독교청지기교육원 목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이다.

셋째, 신천지는 1980년 초 전두환 정권 초기에 탁명환에게 사이비종교 정화운동을 지시했고, 오평호와 결탁해 장막성전을 무너뜨린 것처럼 주장한다. 1977년 박정희 정권 때 남서울대공원 계획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장막성전은 이주 후 철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 당시 이단 사이비 단체가 매우 많았다.

통일교, 전도관, 새빛등대중앙교회, 천국복음전도회, JMS 애천교회, 세계일가공회 등 그 외에 불교계, 민족계 등 사이비종교 단체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만약 1980년대 초 사이비종교 정화운동이 시행되었다면 모두 해당 대상이 된다. 그래서 다 정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모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도 장막성전만 무너졌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음은 신천지 41년의 역사와 그 속에 어떤 권력 체제를 통해 신천지를 이끌어왔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1) 신천지에서 발표한 『종교 세계의 관심사』는 총 3권이다. 이만희 총회장은 자신이 1984년에 국내외에 1만 권을 뿌렸다고 주장하는데 책 이름이 『인류 세계의 관심사』라고 되어 있다. 신천지에서 요한계시록 6장의 청황색 말을 실상의 인물로 가르치는 신상훈씨는 이 책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1981년 2월 2일에 구치소에서 출소한 이만희씨와 신상훈씨는 계룡산 줄기 향적산 차소녀 무당집으로 피신을 했다. 당시 이곳을 ‘구룡정사’라고 불렀다. 신천지에서 요한계시록 11장 두 증인 중 하나로 가르치는 홍종효씨는 자신이 다시 유재열 교주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자 이만희 총회장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수소문해서 찾아보니 이만희 총회장이 향적산 차소녀 무당집 ‘구룡정사’에 피신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곳에 갔더니 신상훈씨와 함께 이만희씨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신상훈씨는 이곳에서 『인류 세계의 관심사』를 이만희 총회장이 아닌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인류 세계의 관심사』는 개정 과정을 거쳤고 1984년 『종교세계의 관심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다음에 2000년도에 또 한 번 개정되어 발간되었다. 이 세 권을 비교해 보면 많은 내용이 수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천지에서 이만희 총회장의 주장이 오류와 문제가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고친 후 재발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 임마누엘 왕 유인구, 삼손 유재열, 미카엘 김창도, 솔로몬 백만봉, 사무엘 정창래, 여호수아 신광일, 디라 김영애, 모세 장로 신종환 이상 8명이다. 영명 ‘디라’는 성경에 없는 인물이다

3) 장막성전의 8명은 자신들이 마지막 시대에 알곡을 추수하는 천사로서의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장막성전에 들어가 이 사실을 직접 듣고 눈으로 목격했다고 하는 이만희 총회장은 거짓 증거를 하고 있다. 장막성전 목자들은 자신들이 세례요한 격 목자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도 모든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만희 총회장은 장막성전 목자가 세례요한과 같은 길 예비 목자의 사명을 받았다고 왜곡하며 거짓 선동을 하고 있다.

4) 증언자 신상훈씨는 전도관에서 박태선 교주 제2의 운전기사로 생활했고 그 이후 장막성전에도 갔다. 신천지에서 신상훈씨를 요한계시록 6장의 네 말 중 청황색 말의 실상이라고 가르친다.

5) 신상훈씨는 목영득과 이만희 총회장의 관계에 대해 이같이 증언했다.

6) 김대원 장로는 솔로몬 재창조교회에서 7사자가 아니라 장로로 불렸으며 박태선 신앙촌 출신 홍종효는 평신도였다. 신천지에서 7대접 실상 인물인 이종호도 신앙촌 출신이며 미장일을 했다. 지재섭은 신앙이 없어 직분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