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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사건 30년
지워지지 않는 조직적 은폐의 흔적들
김정수 기자 rlawjdtn@hanmail.net
2017년 08월 22일 10시 34분 입력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북리에 위치한 오대양(주) 구내식당 천장에서 32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경찰이 조속히 수사를 마무리해 미심쩍은 사건이며, 공식적으로는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하나 재수사가 필요한 미제의 사건이다.

1987
년 8월, 무슨 일이 있었나?

1987
년 8월 29일, 오대양 사장 박순자씨를 비롯해 여성 28명, 남성 4명의 시체가 주식회사 오대양 구내식당 천장에 2중, 3중으로 쌓여 있었다. 눈을 뜨고 입에 거품을 물고 죽은 시신도 있었고, 대부분 입과 코에는 휴지가 틀어 막혀 있었다. 손과 발은 스카프와 내의를 찢어 만든 끈으로 묶인 처참한 모습이었고, 공장장 이경수씨만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13일 전, 박순자씨는 채권자 이상배씨 부부의 빚 독촉이 계속되자, 오대양 직원 10여 명과 함께 약 12시간 동안 이씨 부부를 감금, 집단폭행, 사채포기 각서를 쓰게 했다. 이씨의 고발로 오대양 직원들을 구속하고, 경찰 조사를 위해 24일 오후 박순자씨와 그의 아들 이영호씨가 경찰에 자진 출두해 조사받는 과정에서 졸도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빠져나와 사라졌다. 이후 29일 오대양 구내식당 천장에서 박순자씨와 그의 아들을 포함해 32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오대양사건 현장에서 취재 중인 고 탁명환 소장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집단자살을 한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공장장 이경수씨가 박순자씨의 두 아들과 함께 29명을 목 졸라 살해한 후 두 아들도 죽이고 이씨는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또 마지막에는 이경수 혼자 31명을 목 졸라 죽이고 자살했다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경찰은 독극물이나 마취약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반항 없이 살해된 이유에 대해 섭씨 36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공장 천장 안에서 거의 밥을 먹지 못한 채 4일간 은신해 있는 과정에서 모두 탈진, 가사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당시 직접 취재했던 고 탁명환 소장은 경찰의 발표가 논리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32명 모두가 다 가사상태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45세나 된 이경수만 힘이 펄펄 솟구쳐 한 두 사람도 아닌 30여 명을 목졸라 죽였겠는가”라고 밝혔다.

경찰발표와 사건현장은 모순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고 탁명환 소장은 경찰의 조급한 수사종결에 의혹을 제기한다. 박순자씨의 사망시간이 다른 사람보다 10여 시간 전이고 뒤통수에 둔기로 맞은 자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두 아들과 딸도 있었는데, 박씨를 먼저 죽였다고 생각할 수 없고, 순순히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36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고열 속에서 4일간 30여 명이 생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경수와 박씨의 두 아들이 탈진, 가사상태에서 29명을 목 졸라 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목을 조르면 마지막 발악과 몸부림을 치기 마련인데 반항한 흔적도 찾을 수 없다며, 고 탁 소장은 다음과 같은 가정을 쉽게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순자씨가 채권자들로부터 거둬들인 100억 원이 훨씬 넘는 거액이 어디론가 제3의 집단에 흘러 들어갔을 것이고, 채권자 폭행사건이 터지자 박씨가 궁지에 몰려 돈의 행방을 발설하면 그 제3의 집단이 파멸되므로 박씨와 일당의 신도들은 빚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집단으로 자살한 것처럼 위장 살해하고 그 범인들은 도망을 쳤을 것이다.

고 탁명환 소장은 사건 발생 2년 후 당시 현장을 찾아 주민을 통해 사건 당일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할머니는 새벽 2시 30분경 안성 쪽에서 승합차 한 대가 오대양 공장으로 들어가서 30분쯤 후에 나와 안성 쪽으로 사라졌고, 한 시간쯤 후에 돌아와 오대양 공장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제3의 장소에서 살해한 뒤 두 차례 승합차가 드나들며 시체를 실어 나를 수 있고, 오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과 코를 휴지로 막았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과학수사연구소 부검팀은 여자 사체 14명을 검사한 결과 정액이 채취되었다고 밝혔다. 32명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성행위가 있을 수 없으니 제3의 살인자들이 죽이기 전에 성폭행을 한 후 교살했다고 볼 수 있으며, 상습적인 범죄자들이라고 추측했다.

탁 소장은 본지 1988년 9월호 “오대양사건 1주년을 돌아보며”라는 제하의 글에서 취재 당시 의심스러운 배경을 설명했다.

32
명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간 오대양참살사건이 속 시원한 결말을 내지 못한 채 1주년을 넘겼다. 1987년 8월 29일, 사건이 보도된 토요일 오후에 나는 왕십리수양관에서 본지 후원으로 가진 올바른 신앙생활에 대한 복음주의전국학생연합회의 1박 2일 수련회를 마치고 장소를 옮겨 밀린 원고를 쓰다가 TV뉴스에서 맨 처음 이 사건을 접했다. 즉시 서울 사무실에 전화를 했더니 각 언론사 기자들이 사무실과 집으로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고 있다고 했다. ⋯ 당시 보도는 오대양교회의 여교주 박순자가 거액의 빚에 몰려 집단 동반자살을 했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 기자들을 만난 뒤 D일보의 K 기자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은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어서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행이 안면 있는 수사 간부가 있어 현장에 들어갈 수 있었고 수사책임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D일보 K 기자도 동석했다. 그 책임자는 동석한 사람이 기자인 줄 모르고 나에게 이 사건은 선거가 임박한 시기인지라 확대시키지 않을 방침이므로 협조해 달라고 했다. 그때 직감적으로 이 사건은 정치권력의 배후가 있음을 감지했다.

충북 보은에서의 나에 대한 집단 폭행사건 직후, 보은경찰서의 한 간부가 무심코 “오대양 사건을 다룬다고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흘린 말에서도 이 집단폭행사건의 배후에도 통일교와 정체불명의 권력층이 도사리고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장기미제사건으로 조사 필요

사건발생 4년 가까이 지난 1991년 7월 10일, 충남도경(현 충남지방경찰청)에 오대양 간부 및 직원 6명이 자수해 왔다. 당시 총무 노씨를 비롯해 3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다고 했다. 자수자 6명은 오대양 채권자 이상배씨 부부에게 집단폭행을 가하여 구속된 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1990년 6월 서로 만나 자수를 결심한 뒤, 1년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수했다고 밝혔다.

▲자수한 오대양 공장 직원들

하지만 고 탁명환 소장은 범인들의 모습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인상은 전혀 느낄 수 없어 의아스러웠다고 말한다. 당시 언론사들도 각본자수 의혹이 짙다고 보도하면서 위장자수에 무게를 두고 수사가 전개되었다. 언론사들은 ▲이들을 장악하는 배후세력의 목적수행을 위한 사주 ▲생명의 위협을 느껴 집단보호를 목적으로 자수 ▲제3의 범죄를 저지른 후 범죄가 드러날까 봐 자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시 경찰은 사건발생 이틀 만에 서둘러 시체들을 화장하고, 옷가지와 노끈, 유류품들을 분실해 버렸다고 한다.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을 뒤로 한 채 수사결론을 미리 정하고 그에 맞는 증거를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모습은 석연치 않다.

▲오대양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시위

오대양 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32구의 시신, 100억이 넘는 피해액, 사라진 돈 등 의문만 가득 남긴 채 세월호처럼 기억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오대양 사건은 수사결론에 의혹이 가득한 사건이다. 장기미제사건으로 분류하고 다시 한번 수사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인기드라마 <시그널>에서도 오대양사건을 장기미제사건으로 언급하며 재수사 대상임을 밝힌 바 있다. 〈시그널〉의 한 대사가 뇌리를 스친다. “미제사건은 누군가 포기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사님이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팟캐스트 이단까톡 청취 Click! "30년 전 오대양사건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