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지일 교수 본지 이사장 겸 편집장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
개혁주체의 ‘예견된 몰락’과 ‘예정된 회복’
한국교회는 ‘개혁의 주체’인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스스로 개혁되고(reformed) 개혁하기(reforming)를 요구받고 있다. 이단에 대한 연구는 동시대 교회가 상실하고 있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회사 속의 이단들은 정통교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며, 세력을 확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단대처’와 ‘교회개혁’은 동전의 양면이다. 윤리적으로 패배한 교회가, 양의 옷을 입고 활동하는 이단을 비판하기 어렵다. 도덕적으로 패배한 교회지도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이단교주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교리적인 잣대로 이단을 정죄하는 동안, 사회는 공공성을 기준으로 이단 문제를 바라본다.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자행하는 교회지도자가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이단 문제에 접근하는 동안, 사회는 윤리적 기준으로 이단 문제를 바라본다. 상식적인 교회가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비상식적인 세습이 아니라, 상식적인 지도력의 승계가 필요하다. 비상식적인 양적성장주의와 대형화가 아니라, 상식적인 공동성장과 고통분담이 필요하다. 교회의 문제는, 교세와 규모의 약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식과 공동체성의 결여에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상식적인 이단 대처가 이단 문제 해결에 효과적이다. 주변사회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상식적 수준의 이단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이단 대처는 교회 내의 ‘정적 제거 수단’이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질 수 있다.
정결한 교회의 이단 대처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교회가 이단들보다 거룩할 때, 사회는 교회의 이단 대처에 공감하게 된다. 교회지도자가 이단교주들보다 도덕적으로 구별될 때, 교회의 이단 대처는 사회적 공신력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교회의 이단 대처에 대해, 사회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냉소적인 한마디를 던질 것이다.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한국교회를 향한 한국 사회의 냉혹한 비판이 고맙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행한 한국교회의 순기능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시기에 펼친 교회의 헌신을 경험한 사회는, 교회의 변질과 영향력 감소에 대해 날카로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경고에 대해 변명만 늘어놓거나 혹은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반면 진지하게 응답한다면, 개혁된 교회는 스스로를 새롭게 개혁해 나아갈 영적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교회가 거룩함과 구별됨을 소유하고, 상식적이고 공신력 있는 이단 대처를 해 나아갈 때,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불확실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 개혁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1)
최순실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교회의 민낯
최순실의 부친 최태민은 ‘목사’의 모습으로 활동한 ‘사이비’였다.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다. 문제는, 다수의 ‘진짜 목사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가짜 목사’ 최태민을 이용했고, 최태민 자신도 신분 세탁과 정치적 활동을 위해 이들 ‘진짜 목사들’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1973~75년 기간 동안 고 탁명환 소장은 원자경(최태민)을 여러 차례 만났다. 1973~74년에는 무속인 원자경이었으나, 1975년에는 목사 최태민으로 변신해있었다. 월간 「현대종교」 자료실에는 탁 소장이 수집한 최태민 관련 일차자료들과 관련 증언들이 보관되어있다. 이를 통해 최태민의 신분세탁이 진행된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샤머니즘적인 모습을 노출했던 원자경은 1975년 이후에는 갑자기 목사 최태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시 우연히 대한구국선교단에 관한 신문 보도에서 최태민의 모습을 발견한 탁명환 소장은 그를 찾아갔고, 원자경이 목사 최태민으로 변신한 사실을 확인한다. 그것도 평범한 목사가 아니라, 막강한 핵심 권력층을 배경으로 갖고 있던 ‘가짜 목사’ 최태민이었다.
주목할 점은, 그의 어설픈 ‘가짜 목사’ 행세는, 권력에 기생해 영화를 누리려고 최태민 곁에 모여들었던 많은 ‘진짜 목사들’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최근 국정 농단 파문과 관련해 자유롭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탁명환 소장은 최태민과 그 측근들을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라고 불렀다. 최태민은 물론이고, 그를 통해 정치권력 핵심에 접근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최태민을 이용한 기성교회 목사들에게 탁명환 소장은 더욱 실망했다. 최태민의 측근 목사들은 소위 구국십자군 소속임을 내세워 카키색 군복을 입고 십자가 모양의 별을 달고 허세를 부렸다고 한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장군 지휘봉을 들고 탁명환 소장을 찾아와서 최태민에 대한 조사와 비판을 중단하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들은 탁명환 소장을 찾아와서 “말조심하라. 이분[최태민]이 어떤 분인 줄 알고 함부로 말을 하느냐. 그런 식으로 하면 신상에 좋지 않다”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이 일을 겪은 탁명환 소장은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진짜 목사가 가짜 목사를 비호하고 두둔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라고 한탄한다.
탁 소장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마저도 탁명환 소장을 찾아와 최태민에 대한 비판을 중지해달라는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최태민과 최순실 사건을 지켜보며 한국교회를 향한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가짜 목사 최태민과 그의 자녀 최순실이 한국사회에 끼친 해악에서 한국교회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소위 정치적 영향력과 교권에 집착한 일부 정통교회 목회자들이 최태민의 등장과 성장을 위한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가? 최태민이 이들 목회자들을 이용한 것인가, 아니면 목회자들이 기꺼이 능동적으로 이용당한 것인가? 한국교회는 진정 ‘개혁의 주체’인가, 아니면 ‘개혁의 대상’인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목전에 두고 터진 최태민과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은, 한국교회가 겸허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스스로 파문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기에 앞서, 이번 파문의 원인을 제공한 가해자들 중 한국 교계 지도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역사와 민족 앞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개혁을 위한 선한 연대
이단대처에 있어서 연합적 대처는 가장 효과적이다. 개인이나 개교회 차원의 이단대처는 고립적이고 수세적일 수 있지만, 연합적 이단대처 활동은 효과적이고 영향력이 있다. 만약 여기에 주변사회가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교회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이단대처 전략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강력한 이단대처의 조건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최근 교회의 연합활동이 오히려 이단대처 현장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우려가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이단문제를 명분으로 정치적인 이합집산과 내홍을 오랜 기간 겪고 있다. 연합기관이 이단대처의 중심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불건전한 개인과 단체들이 신분을 세탁하고 면죄부를 받는 장소로 악용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로 인해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은 연합기관의 공신력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활동과 존재 이유를 합리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주변사회도 이러한 연합기관의 파행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한국교회의 시급한 당면과제인 이단, 이슬람, 각종 비성경적 문화에 대해 교회가 목소리를 높이면, 교회 스스로의 개혁을 요구하는 반대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것이 오늘교회가 직면한 현실이다.
교회의 연합적 이단대처는 교회역사의 오랜 전통이다. 이방인 선교와 관련된 교회의 첫 위기를 예루살렘과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극복했고, 이단과 관련한 초대교회의 문제를 모든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신학적 변증과 대처의 길을 찾았다. 이러한 연합적 이단대처는 중세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특히 교파주의를 운명적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에서 연합적 이단대처는 운명적인 과제이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절실하다. 이단대처 현장은 반드시 교단정치의 청정지역이 되어야 한다. 이단대처는 ‘정적제거와 교권장악을 위한 마녀사냥’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을 정결하게 수호하기 위한 선한 싸움’이어야 한다.
1) 이 글은, 지난 3월 18일 한국교회사학회, 복음주의역사학회, 한국장로교신학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발췌하여 게재한 것이다. 그리고 “거룩함과 구별됨을 수호하는 이단교육”, 「교육교회」 (2017.3), “최태민과 한국기독교”, 「기독교사상」(2017.2), “연합과 야합 사이에서” 「한국기독신문」 (2017.2.16.)을 통해서도 동일 내용이 소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