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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을 정의(定義)하다
민호기 목사 mrmad@hdjongkyo.co.kr
2018년 04월 27일 11시 51분 입력

 

▲민호기 목사 
  찬미워십 대표 
  소망의 바다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교수

  

지난 호에서 CCM은 ‘동시대의 기독교 음악’으로 찬송가, 복음성가, 경배와 찬양, 클래식 성가 등 우리 시대에 통용되는 모든 기독교 음악을 포괄한다고 정의했다. Contemporary ChristianMusic. 이 세 단어로 이뤄진 정의는 어느 단어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각도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Contemporary에 집중할 때, 가사와 메시지의 시대성이라든지, 사회 ·문화적 흐름, 과학·기술·정보의 진보, 트렌드의 민감성, 전통과의 연속성, 세대 ·민족 ·종교 ·인종 간의 통용성과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등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복잡하고 보다 입체적인 이슈들에 직면해야 한다. 시대를 통찰하는 마인드와 스피릿이 필요한 대목이다. 사실 우리가 체감하는 Contemporary란, 현상적으로 드러난 현대적 음악의 유입과 교회가 겪은 진통과 변화 정도가 전부였다. 시대성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 채 소모적인 음악 장르 논쟁 차원에서 그쳐 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후에 다시 다루겠지만 근래 논란이 되었던 EDM 문제 등도 음악적인 문제와 더불어 시대성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유행에 민감하거나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뉘앙스가 강한 Modern의 개념에 대비되는, 보다 세대와 지역과 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개념인 Contemporary 정신의 구현이야말로 CCM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Christian에 집중할 때 맞닥뜨리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크리스천이 만드느냐, 혹은 크리스천이 누리느냐다. 쉽게 말해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동시대의 기독교인이 만드는 음악’이냐, ‘동시대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음악’이냐의 문제라는 거다. 이 문제는 자세히 따지고 들면 매우 민감하다. 가사나 내용에 상관없이 크리스천이 만들기만 하면 CCM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들이 듣고 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가령 불신자 가수가 아무리 멋진 목소리로 Amazing Grace를 부른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찬양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처럼, 노래의 주체는 창작자 본인인가 해석자의 문제인가는 물음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난제로 남았다.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려는 크리스천이 만든 현대적 노래’라는 정의조차 일면 합당한 정의 같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제한적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의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예술이기에 ‘의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술에는, 혹은 인간의 모든 삶에는 지성이나 의지만큼이나 중요한 감성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것 역시 우리의 창조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굳이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려는 의도까지는 없었으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느낀 감정을 노래로 표현한 것’도 CCM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창작자 본인에게는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그 노래를 듣는 이들의 해석으로 그 노래에 전혀 새로운 의도가 생기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혹은 어떤 특별한 계기로 작자 본인에게도 처음과 달리 어떤 의도와 의지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노래는 창작자의 것임과 동시에 해석자의 몫이다. 우리는 CCM을 지나치게 ‘목적성’아래 가둬두려는 시도를 그칠 필요가 있다. Music에 대한 내용이, 교회 안에서의 CCM 관련 논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이 문제만 조명하고 관심을 기울이다가 더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치는 우를 범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문제는 단연 음악 장르 논쟁이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음악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며, ‘모든’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옹호론자와 ‘어떤’음악으로만 예배할 수 있다는 비판론자의 대립은 첨예했다. 물론 이 또한 대세에의 수용 정도 차원에서 유야무야 된 것이 다행스러운 한편, 아쉽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어야 했다. 음악의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가사만으로 모든 것이 판단된다는 손쉬운 결론을 내렸다. 나 역시 20대엔 가치중립론의 철저한 신봉자였고, 그래서 음악사역자면서도 오히려 음악 자체보다 가사에 더 집중했었다. 스스로 CCM을 ‘Contemporary Christian Message’로 정의할 만큼 천착했던 가사의 중요성,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믿었던 그 굳건한 믿음이 어느 순간부터 본질을 흐릴 수 있는 유인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의 이슈였던 음악 장르 논쟁 같은 소모전을 치러내기에도 버거워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난 호에서 살펴본 벤다이어그램의 틀 속에 갇혀 교집합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더 확장해보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나싶다. 은유와 직설의 경계에서 CCM이, 혹은 CCM의 가사가 복음을 전하는 완전한 메시지로써의 매개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전 단계로써만 유용한 도구에 불과한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치중립성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면 꼭 신앙적, 복음적 가사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를, 내 감정을, 내 생각과 의지를 전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닿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가 향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든, 주님의 보좌든 크게 관계없다는 것 또한 깨달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을 향할 때는 은유, 하나님을 향할 때는 직설, 사람을 향할 때는 팝 음악, 하나님을 향할 때는 클래식 음악이라는 식의 이분법에도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굳이 가사에 담아내는 메시지에 집착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만드는 음악이 가진 영성을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영성의 가치중립성’이랄까. 음악을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음악 자체가 가진 영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공격적인 록 음악이 가진 위험성만큼이나, 안정적인 클래식 음악이 가진 위험성도 크다.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흥분만큼, 역으로 음악이 가져다주는 마취나 환각 또한 무서운 것이다. 이것을 중화하고 다스리고 바르게 처방하고 복용하는 것이 이 시대의 CCMER들이 할 일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점은 나는 음악의 가치중립성을 부정하는 입장으로 전향하진 않았다. 오히려 근래 워십 음악의 범람으로 가사의 깊이와 메시지의 무게감이 현저히 저하된 점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같은 가사에 대한 지나친 반복과 적나라하게 단순하고 직설적이기만한 초보적인 가사들, 교회 일주일만 다니면 누구라도 쓸 수 있을 법한, ‘초등학교 5학년 수준의 가사들’(이라 표현한다면 너무 지나친가). 물론 복음의 진리는,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최고의 표현은 단순하고도 직설적인 것이고, 또 그렇게 표현할 때 힘이 있다. 그러나 그것밖에 없다면?평생을 함께한 부부가 ‘사랑해’라는 직설적인 표현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말 밖에 못 하는 건 더 큰 문제다. 때로는 시를 쓰고, 세레나데를 부르며, 때로는 정성을 다한 선물을 사고, 깜짝 놀랄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이 소중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특별함을 요구하는 건 무리겠지만, 예술로 하나님을 높이기 원하는 이들에게서조차 이런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참으로 유감이다. 우리는 음악가이자 동시에 메신저로서 다양하고도 진실한 메시지를 길어내는데 기꺼이 인생을 걸어야 한다. 또한 메신저로서의 사명감만큼이나 음악가로서 영혼과 마음과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음악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