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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예배의 두 가지 얼굴 (下)
민호기 목사 mrmad@hdjongkyo.co.kr
2018년 08월 31일 17시 43분 입력

▲민호기 목사
  찬미워십 대표
  소망의 바다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교수

 

지난 호에 짚어본 긍정적인 면 외에도 찬양예배가 안고 있는 몇 가지 한계 상황들을 짚어보고자 한다. 현대화된 교회가 잃을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단연 첫째는 예배문화의 변화에 따른 ‘성역(Sanctuary)개념의 상실’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손실이다. 단식투쟁하는 정치인이나 피신한 노조위원장뿐 아니라 일반인들마저도 명동성당이나 불교사찰에게서 느끼는 성역의 아우라는 현대교회와는 이미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이는 단순히 근래의 현대적 교회 건축양식이나 한국교회 전반의 정치적 보수성 등의 현실적 면면으로부터, 예배와 예전 형식의 현대화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꽤나 깊고도 심각하다. 지금 우리의 교회를 보라. 제단(Altar)은 무대(Stage)로 탈바꿈했고, 회중석은 웬만한 극장이 부럽지 않은 편안한 객석이 되었다. 과거에 비해 회중의 예배에 대한 적극적 참여나 표현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더 구경만 하기가 좋아진 것 또한 사실이다. 예배는 웬만한 예술 공연의 수준으로 잘 기획되며 각종 멀티미디어와 PA 시스템으로 무장까지 했으니 더더욱 예배자는 관객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현대음악예배 교육 프로그램들을 통해서 훈련된 예배 인도자들의 인도에 자연스럽게 끌려가다 보면 오히려 스스로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올려드릴 여지가 없어지는 것을 발견할 때가 적지 않다. 물론 현대적인 예배의 장점 또한 매우 많고, 전통적 예배의 단점 역시 없진 않다. 그러나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최근의 현대적 예배로의 편향된 경향성은 오히려 정적인 전통예배의 중요성을 묻게 한다. 일주일 내내 어딜 가나 듣게 되는 현대적 음악의 홍수 속에 지친 이가 구별된 하루에 교회에까지 가서 듣고 부르는 음악마저 그와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라면 그 시간과 공간이 ‘성역’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세상에서 지친 마음과 몸을 조아릴 ‘교회’라는 특별하고도 구별(성경적으로는 ‘거룩’에 해당하는)된 ‘공간’에, 가장 높으신 이를 대면하여 만나는 ‘예배’라는 아름다운 ‘시간’에 가장 잘어울리는 표현방식이나 음악이 어떤 것일지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찬양예배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예배를 고역으로만 여긴다. 마치 편식하는 아이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자극적인 것만 골라 먹다 보니, 다른 음식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다. 청년부 찬양예배에서 춤추고 뛰었다면, 전통적인 일요일 낮 예배에서는 엎드릴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기뻐 뛰며 춤추지만, 엎드릴 줄 아는 예배자, 형식에서의 자유를 누리지만 본질의 회귀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전문가의 부재이다. 예배에 있어 성례의 집전은 목회자 중에서도 목사에게만 부여된다. 말씀의 선포, 강도권은 신학을 수업한 전도사 이상, 일부 교회나 부서의 경우 교회학교 교사 이상이 메시지의 선포를 맡기도 한다.

일반 예배의 공 기도는 대체로 집사 이상의 직분자가 맡는 데 반해, 찬양 인도는 특별한 기준이 없다. 음악만을 전공한 성가대 지휘자에게, 혹은 노래 좀 하는 청년에게 쉽게 맡겨 버린다. 좋게 말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말씀 묵상, 기도, 찬양은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도 누구에게나 부여된 특권이지만 공예배의 경우 문제는 전혀 다르다. 가능하다면 훈련된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유독 찬양에 대해서만은 이 기준은 지나치게 낮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부르심의 확인과 신학훈련을 거쳐 사역현장에 서기까지는 적어도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찬양예배 인도라는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데 있어서 필요한 신중함을 간과한 한국교회는 음악성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혹은 아무에게나 맡겨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필자가 자주 주장했던 ‘콘티는 신학이다’라는 명제는 『Art Of Worship』의 저자 그레그 시어의 ‘레퍼토리는 신학이다’라는 말로 반복된다. 교회 안에 음악 전문가는 많은데, 정작 신학과 음악 양쪽을 이해하는 전문가는 매우 드물다. 찬양예배의 인도자는 싱얼롱을 인도하는 레크레이션 강사와 다르고, 콘서트를 이끌어가는 스타와 다르고, 설교를 하는 목회자와도 다르다. 찬양예배 인도자가 서 있는 매우 중요하고도 독특한 지점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워십리더’라 불리는 찬양예배 인도자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권리 탓에 설교자 이상으로 예배의 흐름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가령 어떤 노래의 후렴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많이 반복해서 부른다든지, 멘트의 양이나 질의 문제 등은 오히려 예배의 중심을 흐리게 만드는 문제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부수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근래 ‘워십리더’가 크리스천 중고생들에게 장래희망으로 손꼽힐 정도로(불과 몇 년 전에는 ‘CCM 가수’가 그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찬양 인도자에게 부여되기 쉬운 스타십 역시 철저히 경계되어야 한다.

셋째, 전통적 예배 형식의 해체 혹은 변화로부터 비롯된 찬양예배의 스타일이 또 다른 형식으로 정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여러 찬양예배들을 비교해 보라. 교단에서 정해 준 예배 모범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찬양예배는 이래야한다는 식의 전형적 진행이 대부분이다. 조용한 음악이 깔리며 예배가 시작된다. 후렴구부터는 여러 악기가 연주되며 강렬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고 회중들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한다. 노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다가 기도를 하기도 한다. 특별히 인도자가 기도 제목을 말하지 않아도 연주가 시작되면 훈련된 사람들처럼 알아서 다들 기도를 한다.

기도가 끝나면 또다시 후렴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갑자기 반주가 멈추며 회중들의 목소리로만 찬양한다. 노래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박수를 친다. 빠른 곡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환호하며 박수를 치고, 곡에 따라 뛰며 노래하기도 한다. 곡 중간에 악기들의 솔로가 나오면 함성으로 화답해주는 건 센스이자 예의라 여긴다. 그러다 설교자가 나와 메시지를 전하고, 설교가 끝날 때쯤 기도를 하면 밴드가 다시 입장해 조용한 연주로 분위기를 잡아준다. 조용하게 묵상하며 기도할지,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통성기도를 할지를 결정해 주는 것도 밴드의 연주 스타일이다. 예배의 말미엔 주변 사람들과 축복송을 부르며 모임을 마무리한다.

찬양예배에 익숙한 회중들은 순서지가 없어도 대충 다 안다. 어딜 가나 다 똑같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적극성이 미덕인 찬양예배에서 손을 들지 않거나 뛰지 않으면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혹은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는 웃지 못할 경우마저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불편한 시간은 옆의 사람을 바라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와 함께 축복송을 불러줄 때인데, 할 때마다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다. 찬양예배는 전통예배에 비해 전반적으로 의식이 간소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스타일의 예배에 비해 오히려 더 경직성을 보이는 경향도 있다. 음악 스타일이 진보적이라면 여지없이 영성보다 음악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여기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 예배의 본질을 벗어난 것으로 매도하는 폐쇄적 보수성을 가지기도 한다.
 

넷째, 세상과의 소통 가능성의 약화다. 앞서 언급한 찬양예배의 경직성과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인데, 언젠가 한 목회자로부터 ‘타성에 젖은 경배와 찬양은 아편’이라는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일반적으로 찬양예배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감성적인 면에 강하게 호소하는 부분이나 신비적 체험이나 은사주의로 치우칠 위험성이 많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예배 사역팀이나 인도자들의 상당수가 성령운동에 치우친 ‘은사주의’계열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예배에서 추구하는 ‘영적인 깊이’를 종교적 카타르시스와 혼동하는 경우들이 많다.

복음의 메시지를 담은 은유적인 가사와 트렌디한 음악으로 세상과의 소통 가능성에 인생을 걸었던 ‘CCM 가수’들은 하루아침에 거룩한 ‘예배 인도자’로 변신했다.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과 세상’을 고민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런 것을 더 영적인 것이며 신앙의 성숙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고 머무르기를 구한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닮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우리는 기꺼이 동산을 내려가야 한다. 동산 아랫마을, 거기에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 동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있다면 마을에서 드려야 할 예배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의 진정한 발전은 회귀다’는 명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배 형식의 변화를 무조건 ‘우화(羽化, emergence)’로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대적인 예배(Modern Worship)는 전통적 예배(Traditional Worship)의 진화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예배가 ‘본질’이고, 현대적 예배는 달라진 ‘형식’으로 인식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것이므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성경적 균형감’이라 하겠다.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 이멀징 워십(Emerging Worship), 블렌디드 워십(Blended Worship)등의 대안적 방법론에 대한 회의감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보다 정확한 방향으로의 진로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당연한 말의 반복이지만 한국교회가 이제 집중해야 하는 것은 본질과 형식의 유기적 공존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형식이 변화되더라도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가능성에의 모색은 현대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최대치의 발전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배란 본질이자, 형식이다.”이 아이러니한 신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예배회복은 요원하다. 이제 맺어야 할 결론이 양시론의 그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균형감의 강조’정도의 수준에 그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러나 깊고도 넓고도 오묘한 예배의 신비를 한두 마디로 진단하고 정의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이다. 그렇기에, 평생을 들여 관찰하고 연구하는 예배자의 길을 기꺼이 선택하려 한다. 여인은 ‘어디서’예배하느냐를 궁금해 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 ‘어떻게’예배하라고 답했다. 본질의 수호와 형식의 변화를 넘어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을 향한 시편 기자의 고백은, 예배란 이 모든 ‘본질과 형식’, ‘전통과 개혁’, ‘엄숙과 열정’을 품어내고도 남음이 있는 것임을 증명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1)
한국교회는 아멘 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