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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무죄인가, 유죄인가?
민호기 목사 mrmmad@hdjongkyo.co.kr
2018년 10월 31일 09시 33분 입력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된(최소한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 우리는 수많은 예배를 드려왔다. 수많은 찬송을 불렀고 수많은 설교를 들었고 수많은 기도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보통의 성도가 일주일에 두 번만 예배에 참석한다 해도 그는 평생 대략 6000~8000번의 설교를 듣게 된다. 

▲민호기 목사
찬미워십 대표
소망의 마다
대신대학교 교회음악교수

  

그가 좀 더 신실하여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소그룹 예배, 새벽 기도회까지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평생에 걸쳐 적어도 3만 편 이상의 설교를 듣고 최소 5만 번 이상의 찬송을 부른다. 매일 QT까지 한다면 어마어마한 양의 묵상과 성경 해석과 적용과 결단을 그에 더해야 한다.

  

이미 구원의 은총으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된 그는,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린다. 혹은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탄의 올무를 끊어 버리려, 세상의 풍파를 헤쳐 나오기 위해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린다. 이 정도 공을 들였면 우리는 성자가 되었어야 마땅할 텐데, 슬프게도 우리는 도통 잘 변하지가 않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영화 <봄날은 간다>의 대사를 기억하는가. 사람은, 사람의 감정은, 또 사랑이라는 가장 강렬한 감정은 쉬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편 과연 근본적으로 사람은 변하는가? 뜬금없지만 신랄한 질문을 던져본다. 설교가, 찬양이, 뜨거운 방언 기도가 과연 한 사람을 온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물음표를 띄워올린다.

  

수련회 마지막 날 밤에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하고 결단하고 돌아온 다음 날, 이전의 죄악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해본 기억이 있는가? 다음 수련회는 너무 멀리 남았고 죄악의 쓴 뿌리는 손닿을 듯 가깝다. 왜 이런 주제와 관계없어 보이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다. 조금만 관점을 바꾸어 보면, 사람이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미디어가 가진 영향력이 생각보다 미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는 음악이라는 매개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만큼이나 그 위험성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심을 가져왔다. 루시퍼의 교훈을 잊지 못하는 우리에게, 음악은 때로는 천사의 날개를 달았다가 악마의 얼굴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어떤 음악에는 유죄를, 또 어떤 음악에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할지 제대로 된 판례를 세우지 못한 채 갈팡질팡 해왔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더 좋아지기 위함보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것들을 쏟아붓는다. 그래서 우리는 성소의 진설병 상의 떡을 매일 교체하듯이, 지속적으로 혹은 결벽증적으로 여러 신앙 행위를 통해 방어태세를 취해왔다. 때문에 신앙을 ‘지킨다’는 수동적, 방어적 표현을 사용하지만, 신앙을 ‘누린다’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지켜내는 것으로 정의하는 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매사에 능동적일 수 없다. 특별히 음악을 비롯한 여러 미디어와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교회가 방어태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우리는 세속문화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며 관찰과 경계를 게을리할 수도 없다. 특히 이단 문제나 교리 같은 본질과 진리에 대한 공격에는 철저히 대비해야 하고 작은 틈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별 것 아닌 것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자칫 과한 반응이 오히려 교회와 세상의 이원성을 증폭시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장애를 만든다.

  

‘교회 안에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식으로 방관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를 둘러싼 여러 문화적인 경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규정해서도 곤란하다. 다소 무책임해 보이기는 하지만 명쾌한 로렌 커닝햄의 비유를 들어보자. 예배당 설교 강단 위에 똥이 있다. 누가 눈 똥인지, 뭘 먹고 눈 건지, 굳은 상태를 봤을 때 눈 지 얼마나 됐는지 등을 분석하며 작대기로 똥을 뒤적일 필요는 없다.

  

냄새나는 똥은 예배당에서 빨리 치워버리면 된다. 때로는 분석보다 무시가 현명할 때가 있다. 실제로 비교, 분석조차 하지 않은 문제를 두고 소모적인 논쟁이 오갔던 적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뉴에이지(New Age)다. 1980년대부 1990년대 초반까지 이교적 명상 운동의 한 흐름이었던 뉴에이지 운동이 서구를 중심으로 잠시 유행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불교나 도교 문화권 아래 유사한 명상이 일상화되어 있던 우리나에는 이런 사상적 뉴에이지는 거의 발붙이지 못했고, 당시 음반시장 호황과 맞물려 뉴에이지 음악만 잠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현대적인 스타일의 음악이 교회로 유입되던 시기, 교회와 교회 음악의 주적(主敵)은 드럼과 일렉트릭 기타같은 시끄럽고 과격한 록 음악이었는데, 순식간에 대세로 교회 안에 자리를 잡아버리고 나니 생뚱맞게도 정반대의 방향으로 공격대상이 바뀌어버렸다.
 

실제로 뉴에이지 사상을 기초로 한 음악은 극소수에 불과했음에도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심플한 연주 음악은 무조건 뉴에이지로 몰아세우는 무지몽매함으로 비웃음을 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에서는 이게 먹혀들었다. 그들이 뉴에이지로 지목한 아티스트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며 만든
곡마저 뉴에이지 취급을 받은 그들은 억울함과 황당함을 항변하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조지 윈스턴George inston, 김광민, 이루마는 개신교, 엔야(Enya)는 가톨릭 신자, 야니(Yanni)와 반젤리스(Vangelis)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다.)

심지어 크리스천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과 뉴에이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곡을 블라인드 테스팅을 했는데 실험에 참여한 그 누구도 명확히 구분해 내는데 실패했다. 특히 연주곡의 속성상 음악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 판단이 불가능하다. 가사가 있으면 명확해 지지만,가사가 없으면 해석은 듣는 이마다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연주곡의 제목이다.

필자가 수업 시간에 유희열의 피아노 연주곡 ‘익숙한 그 집 앞’을 들려주며 학생들에게 연상되는 제목을 말해보라 했니, ‘소녀, 이별, 저녁노을, 가을바다, 그리움...’ 등 사람, 시간, 풍경, 계절을 연상하는 다양한 제목을 적었다. 정답을 발표하고 난 뒤 그럼 이 집이 누구 집일 것같냐고 다시 물었더니, ‘짝사랑하던 소녀의 집, 어릴 적 살던 집, 친한 친
구의 집, 시골 외갓집까지...’ 더욱 구체적인 답변이 쏟아졌다. 가사가 있어 내용과 의도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노래와 달리, 같은 음악을 듣고도 서로 다른 대상이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는 건, 바꾸어 말해 연주음악 그 자체로는 내용과 가치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보다는청자의 해석이 더 중요해지는 대목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뉴에이지의 주범으로 지목되던 조지 윈스턴의 ‘Jesus, Jesus, Rest Your Head’의 제목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다. 필자의 해석은 ‘예수여, 예수여 편히 머리를 뉘어 쉬소서’이다.

이 곡이 수록되어 있는 음반은 조지 윈스턴의 사계 시리즈 중 겨울에 해당하는 이고, ‘Thanksgiving(추수 감사)’를 첫 곡으로 바흐의 ‘Jesus, Joy Of Man's Desiring(예수, 인류의 소망과 기쁨)’을 변주한 ‘Joy’, ‘Carol Of The Bells’, ‘Some Children See Him’ 등 성탄을 연상케하는 수록곡들과의 연관성을 감안하자면,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을 기초로, 누일 곳 없어 구유를 요람 삼아야 했던 아기 예수님을 향한 애정을 담아 이런 제목을 붙였을 거라 추정한다.

그러나 당시 대중문화에 대해 극단적인 반대 운동을 하며 뉴에이지를 경계하던 이들은 머리를 쉰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고 이 곡을 예수의 죽음을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인들의 자유겠으나, 기독교인인 조지 윈스턴이 내한 공연 당시 인터뷰 때 뉴에이지에 관련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불쾌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런 이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 39)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기도 하고 감정을 고조시키거나 가라앉히기도 한다. 뉴에이지 음악을 듣고 나른함을 느끼거나 우울감이 찾아올 수도 있다. 드럼과 일렉 기타가 스피커를 찢고 터져 나오는 록 음악을 들으며 파괴본능이 꿈틀거릴 수도 있다.

EDM과 앰비언트의 반복적 사운드에 잠시 몽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음악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진대, 음악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거나 근본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노래 한 곡이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로
는 백날 들어도 변화는커녕 무덤덤해지기도 한다. 평생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를 해도 잘 변화되지 않는 사람의 성정이 음악 때문에 부서져 버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음악의 변질을 염려하는 한편 음악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거나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음악이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가, 음악이란 사람의 감정과 이성의 일정 부분을 터치하는 이상은 불가능한가, 결국 음악이란 직접적인 복음 선포를 위한 전제 혹은 수단에 불과한가를 고민해 보아야한다.

음악은 강하지만, 생각보다 치명적이지는 않다. 요리를 하다 칼에 손을 베면 피도 나고 아프지만, 그것 가지고 죽을 것처럼 호들갑 떨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칼이란 본디 경계하고 주의하고 지혜롭게 잘 다루면 되는 것이다. ‘가치중립성’을 가지는 모든 것들처럼 말이다.
 

음악만큼 각자의 기호나 취향이 다양하고 그 진폭이 큰 것이 없기에, 애초에 분명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성경은 찬양할 때 어쿠스틱 기타는 되고 일렉트릭 기타는 안 되는건지, 메트로놈 템포는 얼마 이상이나 이하는 안 되는 건지, 볼륨은 몇 데시벨 이상의 음량을 내면 안 되는지, 특정 화성이나 리듬은 찬양곡에 쓰면 안 되는지를 정확하게 지시하지 않았다.

성경이 이렇듯 음악에 대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 음악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기 때문이다. 부디 소모적인 장르 논쟁이나 특정 악기에 대한 시비로 예배를 허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더 아름다운 것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여러 길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음악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꽃길이 되어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