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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교회사의 마녀사냥에 대해 묻다
이단, 한국교회에게 묻다 (3)
탁지일 편집장 jiiltark@hanmail.net
2015년 10월 31일 19시 50분 입력
▲ 탁지일 교수 (이사장 겸 편집장)

이단도 문제이지만, 이단을 규정하는 주체도 문제라는 이야기가 요즘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다. 이단 규정의 주체가 공신력과 도덕성을 상실할 경우, 이단 규정이 영향력을 갖기 힘들다. 또한 주변 사회의 동의와 공감대를 결여한 이단 규정은, 교회의 교권강화를 위한 지나친 호교론적 접근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단들의 흔한 주장들 중 하나는, 자신들이 ‘교권에 의한 마녀사냥의 피해자들’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교권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이러한 관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과연 이단은 교권유지의 산물일까?

일면 수긍할 수 있는 점도 있다. 교회역사를 돌아보면, 이단정죄가 정적제거의 효과적인 수단인 적도 있었고, 교권 장악과 통제를 위해 악용된 사례도 물론 있었다. 초대교회의 금욕주의적 신앙공동체가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했고, 중세교회 말에는 개혁적인 성격을 지닌 신앙공동체들이 이단이라는 죄명으로 많은 고통을 당한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단이라는 이름은 기독교인들에게 참 조심스럽고 무서운 단어이다.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신대륙으로 이주한 신실한 청교도들에 의해서 자행된 마녀사냥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극단적인 획일주의는, 수많은 평범한 신앙인들에게 마녀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핍박했다. 현대교회 이단대처에 있어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뼈아픈 교훈이다.

하지만 모든 이단규정을 마녀사냥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교회의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대다수 정당한 이단규정이 교회역사에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 못된 가르침을 주거나, 이를 통해 신앙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개인이나 단체를 이단(하이레시스, αἵρεσις)으로 규정하고 있고, 초대교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거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과 끊임없는 씨름을 했다.

교회역사는 일면 이단들과의 투쟁의 역사이다. 이단들과의 투쟁을 통해 교회의 신앙고백, 즉 신앙과 신학이 확립되었다. 교회는 이단들의 어긋난 주장에 대해, 교회는 누구이며, 무엇을 믿는지를 세상에 공개적으로 선언해왔다. 우리는 이를 신앙고백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각기 다른 문화적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신앙고백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한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이단연구가 마녀사냥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이는 한국교회의 교파주의적 특성으로부터 기인한다. 3개 나라(미국, 캐나다, 호주), 6개 교파(미국북장로교, 미국남장로교, 미국북감리교, 미국남감리교, 캐나다장로교, 호주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교회는 운명적으로 교파주의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후 침례교, 성결교, 하나님의성회 등 다양한 교파들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처럼 각기 다른 교리를 가진 교파들이 단일한 이단규정을 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단사이비성이 농후한 단체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세밀한 교리적 검토를 동반하는 이단성 시비에 있어서, 교파주의는 한국교회 목회현장에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가령 한 교단이 특정단체를 이단으로 규정하지만, 다른 교단은 문제없다는 입장을 보일 수 있다. 이는 이단규정의 문제점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 교파주의적 이단연구의 한계인 동시에, (연합기관보다는) 교파 중심의 이단연구가 보다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단 규정은 특정교파의 교리를 넘어, 성경 중심의 한국교회가 공감할 수 있는 이단성을 보이는 단체에게 적용되어야 하며, 한국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규정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교파적 다양성과 한국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단규정은, 그 독단성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연합정신과 한국사회의 동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 이단규정은 충분히 ‘상식적’이고, 신학적으로 ‘명료’하며, 절차상으로도 ‘투명’해야 한다.

교회의 이단연구가 마녀사냥이라고 비판받는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보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정치를 일삼는 교회정치 지도자들로 인한 것이다. 교회의 이단규정은, 이단들마저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진실하고 정확해야 한다. 아무리 종교적인 합리화를 정당화하는 이단들이라고 할지라도, 진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이는 자신들의 고립과 소멸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나름 알고 있기 떄문이다. 이단들에게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 만약 교회가 부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단을 비판하거나,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비난 수준의 공격을 한다면, 이단들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이단규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교회정치 지도자들이 비윤리적이고, 부정직하고, 비전문적인 모습을 노출한다면, 이는 마녀사냥이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이 점에서 교권과 사리사욕에 집착하는 지도자들은, 결코 이단들보다 나은 점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성직은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임을 겸허히 수용하면서도, 교회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자체적인 개혁과 정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건강한 교회가 효과적인 이단대처를 가능하게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성급한 이단규정과 대처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있기 떄문이다. 이단에 관련되지도 않은 신실한 신앙인들이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교회로부터 쫓겨나기도 하고, 가족이 이단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이는 이단문제의 2차 피해라고 할 수 있다.

이단도 문제이지만, 교회의 미성숙함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단으로 몰려 평생 신앙생활 하던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신앙인의 애통함은 어떠할까? 사랑하는 가족을 이단에 빼앗긴 것도 아픈데, 주변 교인들의 눈치까지 봐야하는 비통함은 또한 어떠할까?

이단에는 누구든지 미혹당할 수 있다. 이단 피해 가족들을 목회의 사각지대에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이단대처라는 명분으로 인해, 주님의 몸 된 신앙공동체가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신천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신천지로 인한 교회의 불신과 분열이 무서운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정죄와 분리’가 아니라, ‘사랑과 치유’이다.

분명한 점은, 이단은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의 주요한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이다. 성경과 교회사적 관점에서, ‘진짜’ 이단들은 교회와 가정을 분열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비성경적 적그리스도들이다. “교회의 이단대처가 마녀사냥이 아니냐”는 질문을 교회가 받지 않기 위해서, 이단연구의 정확성과 공신력이 더욱 간절하게 요구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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