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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의 심리분석 (1)
변상규 교수 mrmad@hdjongkyo.co.kr
2016년 06월 15일 10시 47분 입력
▲ 변상규 교수
서울 총신대학교 외래교
수코스타 강사
변상규 대상관계연구소 소장

들어가는 글
10년 전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수업 시간에 갑자기 학생 하나가 엉뚱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수업을 잠시 중단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why?” 그런데 갑자기 강의실 뒤편 문이 열리더니 한 여학생이 케이크를 들고 나오면서 그야말로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해 주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그런데 장난기 많은 학생 하나가 노래 뒤의 가사를 슬쩍 바꿨다. “사랑하는 교주님 생일 축하합니다.”

교주라는 말에 학생들은 웃었고 나도 너털웃음을 웃고 말았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나는 학생들에 대한 고마운 기억과 함께 누구라도 “교주가 될 수 있구나”를 자각하게 되었다. 강의를 할 적에는 자칭 미친 듯 열정을 다하기에 나를 잘 아는 후배는 “형은 강의할 때 보면 교주기가 있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이 글을 한국 교회를 위해 쓰고 있다. 한국 교회라고 말하지만 나는 조국 교회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지금 조국 교회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이단사이비 문제로 고생하는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교회들의 대처는 결국 이단들과 말도 섞지 말라는 경고일 뿐 특별히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단이 생기고 왜 신앙생활 잘 하던 교인들이 넘어가는지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이 늘 부족하다 느껴왔다. 이단 문제는 교리 문제이지만 동시에 가정 문제요 정서 문제이기도 하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사회학적 접근과 종교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함에도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그런 접근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사이비나 신흥 종교 뒤에는 반드시 교주가 있다. 그런 교주들은 추종자 신도들에 신적이며 왕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한다. 교주의 말 한마디에 삶이 바뀐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모든 사이비나 신흥 종교는 끝이 안 좋다. 교주가 사망하거나 병이 들면 그 자식들이나 측근들이 이권다툼의 진흙탕 싸움을 하거나, 추종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다른 유사 사이비나 신흥 종교로 넘어가는 경우도 꽤 많다. 교주들도 처음에는 잠시 신실한 신앙인인 척했으나 결국 성경의 말씀 그대로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쉽게 말하자. 신학대학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신학대학을 군대로 비유하자면 신학대학은 영적 훈련소와 같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이 젊은이가 군대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심리검사를 한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병사는 관심사병으로 분류하여 특별한 관리를 요청한다. 군대도 이런데 그야말로 영적 정규군을 배출하는 신학대학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며 연단 받다가 변화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졸업한다. 그리고 전도사를 거쳐 강도사나 전도사사역을 하다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대로 말하자면 사람을 살리는 실력 있는 의사로 준비시키지 못하고 빈번히 의료사고만 일으키는 돌파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학교를 졸업시키고 사역을 시키며 직분을 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자격미달의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남발한다는 것이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15년 이상을 강의해 왔다. 그리고 나름 치유적 관점에서 많은 과목을 가르쳐왔다. 나는 무슨 강의를 어떤 이름으로 열든 늘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 마음에 치유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고 “내게는 이게 목회”라는 사명을 갖고 강의에 임하였다. 그리고 상담을 통해 간간히 만나는 학생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때로는 충격과 아픔을 느꼈으며 긴 한숨만 쉴 때도 있었다. 도대체 저런 얼굴에서 어찌 저런 큰 상처의 바위덩어리가 들어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확신을 하게 되었다. 내면의 문제가 치유되지 않은 학생들은 리더의 자리에 올라서면 겉만 리더일 뿐 사실 보스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이다. 카리스마가 강하고 섬길 줄 아는 지혜로운 보스면 그래도 감사하지만, 카리스마는 강한데 자기밖에 모르고 하나님을 빙자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통제성 강한 성격의 보스형 설교자나 목회자는 차라리 목사를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회자만 그런가? 교회 내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리더들 역시 문제투성이다. 문제가 없는 인간은 없다. 어차피 인간은 죄인이고 하루에도 끊임없이 죄를 만들어 내는 죄 공장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리더는 그런 역기능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건강해진다. 흔히 말하듯 셀 리더들, 목장이 튼튼해져 간다는 말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리더들의 정신건강이 건강한 교회이며 인간 이해가 깊은 교회이다. 그런 교회느 안심하고 아픈 이야기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일수록 리더의 눈치를 보고 늘 무언가 신앙 좋은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할 것만 같은 심적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즉 자발성이나 기쁨보다는 무언가를 못해서 늘 정죄 받고 괴로운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의 앞날이 밝을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연재될 이번 글은 교주들의 병리적인 성격적 특성에 대해 알려주는데 목적을 두며 교주처럼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길 줄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치유적인 리더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어 쓴 글이기도 하다.

한번은 인터넷에 “보스와 리더”라고 쳐 보았다. 수많은 글이 나오는데 몇 가지 보스와 리더의 차이에 대해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보스는 두려움을 만들고, 리더는 희망을 창조한다.
보스는 비난을 타자에게 돌리고, 리더는 잘못을 바로잡는다.
보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리더는 질문을 한다.
보스는 일을 힘들게 만들고, 리더는 흥미롭게 만든다.
보스의 사람들은 하나씩 떠나지만, 좋은 리더 밑에는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든다.
리더는 ‘가자’라고 말하지만 보스는 ‘가라’고 호령한다.
리더는 ‘우리’를 강조하지만 보스는 ‘나’를 강조한다.
리더는 대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보스는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
리더는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보듬지만 보스는 반대하는 자를 쳐낸다.
리더는 타협과 대화를 즐기지만 보스는 일방성과 독선만 강조한다.
리더는 부하들의 짐을 덜어주지만 보스는 무거운 짐을 떠넘긴다. 리더는 귀가 여러개 있다. 그러나 보스는 그런 소리를 듣는 귀가 없다.
리더는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보스는 철저히 약점을 숨긴다.
리더는 존경을 모은다. 보스는 복종만 요구한다.
리더는 남을 믿는다. 보스는 남을 믿지 않는다. 리더는 선의에 의존하지만 보스는 자신의 권위만 의존한다.

과연 우리에게는 리더에 해당되는 덕목이 몇 개나 될까? 때론 사람들이 너무 강하거나 완고해서 어쩔 수 없이 강력한 보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후에도 강력한 보스가 되려함은 청중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 자신의 문제이다. 이 글은 교주들의 심리적 특성이 무엇인지 정신분석적 관점을 갖고 접근해 본 글이다. 어떤 면에서는 추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 구체적으로 문제를 묘사해보도록 할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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