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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규 교수의 이단 교주 심리분석 (2)
변상규 교수 mrmad@hdjongkyo.co.kr
2017년 02월 14일 17시 10분 입력

▲변상규 교수
서울 총신대학교 외래교수
코스타 강사
변상규 대상관계연구소 소장

 

 

한국교회는 현재 커다란 영적 변환기를 겪고 있다. 많은 교계의 전문가들은 한국교회를 힘들게 하는 이단들은 결국 한국교회의 역기능적 환경 안에서 배태된 독버섯 같은 집단이라고 경고해왔다. 우리가 건강한 영적 체질을 갖고 있을 때 바이러스 같은 이단이나 사교집단에 주님의 양들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 맞는 건강한 신학과 건강한 목회, 그리고 건강한 기독교 세계관과 건강한 인간 이해가 필요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고 한다. 우리가 직면해야만 하는 이단과 이단교주들의 특성을 파악해 목회자들이 더 건강한 목회 리더십을 소유해야 한다.

 

​2. 이단 교주의 이원론적 사고(흑백논리)
Life is Chaos. 산다는 것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건강한 성격을 형성하려면 삶의 애매모호한 측면을 견디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삶의 가변성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삶이나 관계나 현실이 애매모호해지면 곧바로 두렵거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그런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한국교회에 깊이 스며든 왜곡된 가치관 중 무엇보다 해로운 것이 이원론(Dualism, 二元論)적 사고다. 모든 것을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성과 속은 모든 종교에 두루 존재하는 신앙 양식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저서 중 『성과 속』이라는 책이 있다.1) 모든 종교는 성스러움과 속됨을 구분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독교의 독특성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성과 속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일원론적 관점을 갖는다는 점이다. 즉 선과 악이 존재하지만 선과 악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선신이 있고 악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조로아스터교(배화교라 불리는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로부터 시작된 선과 악의 그릇된 이원론은 한국교회 안에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성스럽다는 장소의 구분으로 시작되어 시간의 구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주일은 거룩한 날, 나머지는 속된 날이라고 말이다. 이런 모순은 십일조에서도 드러난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 것, 십 분의 구는 내 것. 그러나, 열 개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닌가? 종교는 분명 구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지나치면 이중성이 되고 이중인격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중적인 이원론의 근원을 인간의 정신에서 찾는다면 어떤 이해를 할 수 있을까? 이미 언급했던 멜라니 클라인은 이 부분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클라인에 의하면 선악의 근원은 엄마의 젖가슴 체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아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기는 처음부터 엄마라는 존재를 다 알 수 없다. 우리는 아기가 출생하자마자 엄마의 젖꼭지를 물고 젖을 빨기에 아기가 엄마를 다 알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본능적으로 엄마를 알겠지만 엄마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인지하는 기간은 대략 6개월 이후가 된다.
 

대략 6개월 이전의 아기들은 어쩔 수 없이 이원론적 세계에 산다. 클라인에 의하면 젖가슴이 전부인 아기들에게는 자신들이 체험하는 젖가슴이 항상 두 개 밖에 없다고 본다.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이 그것이다. 아기는 좋은 젖가슴을 받아들이는데 이를 내사(introjection)된 젖가슴이라 말한다. 반면 좋지 않은 경험을 할 때 아기는 젖가슴을 부정하거나 젖가슴을 의심한다. 그래서 자기 밖으로 밀어 넣거나 혹은 외적 세계로 던져 놓는다. 좋은 것은 가까이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속성이 그것이다. 이를 투사(projection)라 부른다. 아기에게는 젖가슴이 이렇게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런 구별이 형성되는 시기는 대략 출생 이후 빠르면 2~3개월, 보통은 3~4개월로 본다.
 

그러나, 차츰 이 시기를 잘 극복하면 즉 엄마와의 젖가슴 체험이 좋거나 만족스럽게 되면, 아기는 젖가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열린다고 클라인은 보았다. 즉 나쁘거나 좋은 젖가슴, 두 개의 상반된 젖가슴이 아니라, 하나의 젖가슴에서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젖가슴이 존재한다는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정리해보면 클라인의 젖가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아기가 생의 초기에 잘 나오는 젖가슴과 안 나오는 젖가슴이라는 두 개의 젖가슴을 상상하는데 이 시기에 안 좋은 젖가슴을 경험하면 아기는 나쁜 젖가슴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기가 경험한 good과 bad의 경험을 고착(Fixed)시킨다. 이런 고착된 패턴은 자연스럽게 대인관계나 사유의 패턴으로 연결된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사람을 대할 때 항상 나쁜 사람, 좋은 사람으로만 구분한다. 아군 아니면 적군이다. 중간이 없다. 나랑 친하든지 아니면 적이든지 그런 식으로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성격의 사람 주위에 친구가 많을 리 없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누군가를 믿으면 올인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순수함이 있다. 하지만 순수한 것은 깨어지기도 쉽다. 한 번이라도 그런 순수한 기대가 깨어지면 다시 관계가 회복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 마디로 용서가 안 되는 성격이다. 순수한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통합적(integrity) 가치이다. 이 사람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것, 나와 친할 수도 있고 저 사람과 친할 수도 있다는 그야말로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사고이다.
 

교주나 교주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성격을 보라. 그들은 그런 유연함이 부재하다. 오직 아군 아니면 적군이다. 자기에게만 구원이 있고 다른 교회나 다른 곳에는 결코 구원이 없다고 한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요 십사만 사천이라 말한다. 그러다, 십사만 사천 명이 넘으면 십사만 사천이 사실은 영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변명한다. 우리만 휴거될 것이라 생각한다.
 

클라인에 의하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편집 분열 자리(paranoid schizoid position)에 고착된 인격이라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병리적인 사람들이다. 여기서 편집이란 의심을 말한다. 젖가슴을 의심한다는 말(왜 어제 잘 나오던 젖이 오늘은 안 나올까?)이며 분열이란 분열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쁨과 좋음으로 구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성격을 형성한 사람들은 순수하지만 그 순수함이 한번 깨어지면 의심을 시작한다. 그리고 의심의 대상을 담아내지 못하고 투사하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기존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실망을 느끼면 보통 사람들보다 더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며 그곳에는 진리가 없다고 단정한다.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하나같이 불안정한 교회이며 흠이 많은 교회이다. 그런데 그런 교회이기에 실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에 따르는 반응은 지나친 거절감과 피해의식이다. 앞으로 강조하겠지만 목사님이나 장로님과 같은 교회의 어른들에게서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았다면 그 실망은 더욱더 커지게 된다. 이 교회는 사랑이 없는 교회라고 회의하고 의심한다. 다음 수순은 무얼까? 이단이나 신흥종교 사이비 종교에 가담하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나 신흥 종교에는 클라인이 말하는 편집 분열 자리에 고착된 성격의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자들이 추종하는 교주들은 그런 성격을 가진 자들 입맛에 딱 맞는 설교를 한다.
 

“세상은 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다. 세상 교회는 우리를 박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다. 세상 교회는 다 썩었다. 우리는 순수하다. 우리는 영적이며 우리에게만 주시는 말씀의 진리가 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교회는 모두 다 악하고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을 받지만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각자 집을 떠나라, 이곳이 가족이며 우리들이 형제요 자매다. 교주님은 영적 아버지이시며 어머니이시다”
 

어떤가? 천국과 지옥을 이처럼 분명히 강조하면 그들은 더 이상 모든 의심을 버리고 내가 꼭 올 곳에 왔다는 평안함을 느낀다. 그들이 평안을 느끼는 것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가 아니다. 분열적인 자기 성격에 딱 맞는 사람들이 모이고 자기 성격에 딱 맞는 교주의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애매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며 삶의 불안을 참아낼 능력이 없다. 이들은 단순하지만 진리도 단순하길 바란다. 물론 진리는 복잡한 것이 아니다. 진리가 반드시 내 입맛대로 단순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왜곡된 전제 아닌가?
 

예수님도 말씀을 전하시면서 “그런즉 너희는 생각하라” 하셨는데 이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름이 있다. 모든 것을 단순 논리화 하길 좋아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이단들이나 사이비, 신흥 종교의 교주들은 성경을 비유적으로 푸는 것을 즐겨한다. 분명한 것은 한 때 흥왕했던 한 시대의 이단이나 신흥 종교, 사이비 종교는 교주가 죽거나 세월이 흐르면서 기존 교회보다 더 빨리 해체의 수순을 밟거나 그 세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아무리 그들이 자체적인 교단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어 교세를 넓힌다고 해도 “삶”이라는 과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삶은 고통이며 삶은 복잡하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은 그런 경험을 미리했던 미국의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책을 통해 삶이 고통이며 복잡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살라고 역설하였다. 이런 복잡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천국 지옥과 같은 단순 이원론적 틀을 중시하기에 이원론적 사고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여전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성서적이라면 한 마디만 하자. 사도 바울 서신서 중에서 지옥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언급되었는지 신약성서를 자세히 읽어보길 바란다. 놀랍게도 단 한 번도 없다! 그럼 지옥이 없어서 바울이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지옥은 분명 존재한다. 사도 바울은 지옥 선포로 복음을 전하려는 생각조차 못하였다. 바울에게는 지옥을 언급하기에 너무나 전하고 싶은 복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옥이라는 부정적인 언급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주님과의 풍성한 관계를 전하기에도 바쁜 사람이었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교주나 보스와 같은 목회자일수록 설교 시간에 천국과 지옥을 많이 강조한다. 때로는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에 그렇게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해야 겨우 회개하고 두려워서라도 마음을 주께 돌이키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매 번 천국과 지옥을 비교하며 다 지옥 갈 인생인데 천국 가도록 주님이 희생하셨으니 당신들도 죽을 힘을 다해 주님처럼 희생하여 천국의 상급을 얻으라고 설교하는 것도 복음적인 설교는 아니다. 복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은혜에는 율법이 없다. 두려움을 동기화하여 전하는 설교는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서 벗어난 왜곡된 설교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때로 성령께서 청중의 마음에 회개를 주시기 위해 지옥에 대한 언급을 강하게 할 필요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요 신학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런 경우다. 그의 지옥 설교는 사람들을 떨게 했고 회개로 이끌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늘 지옥 설교만 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그가 전한 풍성한 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 하셨지 너희가 “어둠과 싸우라” 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원론적 교회일수록 그리고 이원론적 사고를 가진 설교자일수록 매번 교인들에게 강조한다. 어둠과 싸워라. 악한 영을 대적하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악한 영은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목을 처단하셨다. 사단은 목이 잘린 채 남은 힘으로 발버둥 칠뿐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십자가 사건은 그래서 강력하고 위대하다. 때로 선교지에서는 수도 없이 영적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 역시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영과 싸우기 위해 선교지에 가서 선교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 빛 되심을 증거하려고 선교하는 것 아닌가?
 

준비된 선교사나 말씀 사역자는 그리스도의 빛, 말씀의 빛, 영광의 빛을 드러냄을 통해 영적으로 어두운 곳을 압도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왜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영적 전쟁, 이미 승리하신 영적 전쟁이 부족한 것인 양 우리가 그런 영적 전쟁의 용병이 되길 자처하는가?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지 악한 영과 싸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겠는가?
 

거기다 천국과 지옥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다 보면 마치 천국이 죽어서만 가는 나라라는 암시를 준다. 성경 어디에 천국이 죽어서만 가는 나라라고 기록되었는가? 신학이 부재한 사람들이나 그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인간 구원이라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 함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 개념이 아니다. 즉 특정한 땅을 말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주권 개념이다.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할 때에 그 심령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2)
 

우리는 살아가면서 구약과 신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세상에서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애써야 한다. 그저 세상은 악하고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도 모르는 행위이다. 물론 북한처럼 기독교가 박해를 받는 나라에서는 죽어서 천국 간다는 믿음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다 북한 같지는 않다. 그런데 내면에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박해적인 상황을 만들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원론적 구도를 만들고 자승자박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면 정말 마음에 불안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온이 찾아올까? 나는 심령에 그런 평온을 갖고 있는 이단사이비에 빠진 교인들을 본 적이 없다. 결국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그처럼 믿었던 교주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나는 무얼 믿고 싶었던 것일까”

한번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나 신흥 종교에 빠진 사람들은 기성교회로 돌아가기가 두려워진다. 이단에 속하였다는 이유 하나로 한번 찍힌 사람들을 가슴을 열고 환영하는 교회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돌아간다고 해도 뭔가 감시받는 의혹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그럼 다시 그들 내면의 박해적인 망상이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래서 다시 또 다른 이단으로 또 다른 종파로 이적한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거기서는 그토록 바란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묻고 싶다.(계속)
 

1)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이은봉 역, 한길사 1998
2) 신학자 조지 래드의 책들을 권한다. 조지 래드는 평생을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 대해 강조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