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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삶
여섯 번째 이야기
탁지원 소장 takjiwon@hdjongkyo.co.kr
2017년 11월 03일 17시 10분 입력

 

▲탁지원 소장 본지 발행인

  

각 교단 총회의 이단 관련 결의들은 대부분 시기적절했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좀 더 명확한 연구와 진행이 어느 때보다 아쉬웠던 총회로 기억될 것 같다. 어쩌면 교회보다 대중매체를 통한 이단의 경각이 더욱 피부에 와 닿는 시대,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오랜만에 영화 이야기로 돌아왔다 

 

택시운전사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감독은 현대사의 가장 아픈 기억인 광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재정립한 계기를 마련한 것과 젊은 세대가 5 ‧ 18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을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광주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도시가 이단들로 인한 영적인 피해 역시 크게 겪고 있다. 아마도 전국에서 이단들이 가장 많은 지역을 꼽으라면 광주가 아닐까 싶다. 신천지를 예로 들어도 부산지역의 두 지파를 합한 숫자보다 광주 한 지역 지파의 숫자가 더 많을 정도다. 영화의 내용이야 대부분이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을 테니 따로 언급하진 않으련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아픔이든 영적인 아픔이든 간에 그 회복과 치유는 살아남은 이들과 남아 있는 이들의 몫이라는 거다. 아픔과 상처를 싸매주고 안아줘야 하는 일엔 너나할 것 없이 모두의 동참을 필요로 한다. 영화 한 편이 광주가 안고 있는 아픔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단피해자들의 아픔과 눈물 역시 외면치 말고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마련해나갈 수 있길 바란다.

 

✽ 추석 연휴에 캐나다 에드먼턴 지역 교회연합회 초청으로 잠시 다녀왔다. 오가는 길이 40시간이 걸릴 정도로 멀고, 그리 익숙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그곳까지 한국의 주요 이단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먼 타지에서 위의 글을 쓰고 나니 더욱 감회가 새롭다. 광주를 넘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전 세계 열방에까지 이단문제, 그 대책의 지경이 넓혀질 수 있었으면 한다.

 

아이 캔 스피크

 

<낮은 목소리> 등 그간 위안부를 소재로 한 영화가 몇 있었다. 그 영화들 존재의 이유는 한결같이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싶다. 어떤 역사적 사실도 잊혀서는 안 되기에.

<아이 캔 스피크>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추석맞이 가족 오락영화로만 생각했는데 먹먹한 역사적 울림이 담겨져 있을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2007년 미국 하원 ‘위안부 청문회’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통과를 위해 노력한 이용수 할머니와 고 김군자 할머니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누군가 말했듯 아픈 역사를 유머와 함께 담아내면서 어떻게 ‘무례하지 않을 수 있는지’잘 보여주는 사례로 완성됐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가 영원히 간직하고 기억해야 할 소중한 숙제와 과제로 남겨놓기로 하고, 이 지면에서는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곁에 살짝 안고 있는 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처음엔 늘 그렇듯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을 감내했던 고지식한 노인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영화에서도, 그리고 인물로도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칼럼니스트 이승한의 이야기처럼 주인공은 단순히 괴팍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고, 영화는 그런 그를 쉽게 넘겨짚으려던 주변 사람들과 관객에게 그의 진짜 모습을 성실하게 보여주는데 주력한다. 주인공에게 선입견을 드리웠다가 그게 보기 좋게 깨지는 경험은 기실 우리가 대부분의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름이나 관절의 노화, 기억력 감퇴 등 노년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몇 가지 신체적 특징들로 인해 개인에게서 눈에 보이는 개성을 앗아가 버리고 만다. 그 탓에 세상은 노인들을 나름의 성격과 역사를 지닌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는 대신,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노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고는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그로 인해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보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집회 때 더욱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됐다. 지방에 계시는 두 어머니를 보면 그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그들의 연륜과 세상에 대한 상식과 지식, 그리고 지혜로운 의견들과 믿음까지 더해질 때면 젊은이들은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무언가 시너지 같은 것들이 발휘되어지곤 한다. 카테고리 안에 갇혀 노인들을 평가하는 것을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위안부의 문제를, 그리고 사람에 대한 선입견과 또한 최소한의 배려 등에 대해 선하고 지혜롭게 가르쳐 줬다.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덩케르크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 더욱 사실적이고 선명한 전쟁영화는 끊이지 않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중 특이하게도 <덩케르크>는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살리는 전쟁의 영화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역사적 사실이며, 그에 기초해 만든 영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40만 명의 영국군과 연합군을 구하기 위한 사상 최대의 탈출 작전을 담았으나 본질적으로는 결국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다. 여러 평들을 종합해보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사건에 극적인 드라마는 없다.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앳된 군인들이 도버해협을 건너 집으로 돌아간다. 그게 전부다. 귀향을 방해하는 장벽이 있지만 사건이라기보다는 사고에 가깝다. 말하자면 <덩케르크>는 100분 가량 지속되는 전쟁 속 시간에 대한 묘사다. 캐릭터와 사건, 인물들의 충돌을 서사의 축으로 삼은 여타 전쟁영화와 달리 <덩케르크>는 이야기에 한정해서 볼 때 빈곤하고 빈약한 평이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이 영화 이야기를 지면에 담고 싶었던 이유는 작금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제 정세의 상황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결국 ‘죽임’이 아니라 ‘살림’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아울러 영적전쟁에 있어서도 이단에 대한 ‘증오’보다는 ‘회복’과 ‘살림’이 영적전쟁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 죽고 죽이지 말고 함께 살 수 있길! 더욱 잘 살 수 있길! 소망해마지 않는다.

 

공범자들

 

1. 새 정부 들어 상업영화와 다큐영화를 막론하고 역사적,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최승호 감독의 영화 <공범자들>은 평론가 정지욱의 이야기처럼 제도권 뉴스와 시사프로그램들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과거의 적폐를 지적하고, 청산을 촉구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 영화 잡지 등도 많고, 평론들이 줄을 잇고 있지만 영화에 문외한인 이가 영화 이야기를 이따금씩 칼럼에 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로는 영화라는 매체로 사회와 종교를 이야기할 수 있어 좋고, 교회와 이단에 대해 비유와 적용을 통해 그리 무겁지 않게 말할 수 있어 편하다. 그간 ‘이단’이란 단어는 세월호 사건 때 한동안 언급되긴 했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들과의 주제로는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런데 몇몇 드라마와 영화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단과 사이비를 논할 수 있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3. 영화 <공범자들>은 같은 언론인으로써 그동안 정직하고 건강한 공영방송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워왔던 9년간의 기록을 담은 영화이다. 관람하신 분들은 알겠지만 언론이 그 입을 다물게 되고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 때 우리의 눈과 귀가 멀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소리쳐야 할 것들에 침묵하고, 들어야 할 것들에 귀를 막게 된다면 언론의 사명은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여전히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갈 수 있도록 세상의 언론은 세상 언론대로, 본지는 본지의 건강한 방식으로 모두가 가야 할 길, 잘 견뎌 낼 수 있길 바란다.

 

김광석

 

1. 부러 영화를 보지 않았다. 개봉관을 찾기 힘들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젊은 날 위로가 되었던 그의 노래가 최근의 여러 사건들과 맞물려 세상뉴스에 등장하며 온갖 눈총과 이목을 받는 것 그 자체가 싫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생전에 불렀던 노래의 가사 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 상황의 묘한 뒤섞임이 어서 끝이 나길 바란다

 

2. 선친이 떠난 1994년 2월, 그 한 달 전쯤인가 통일운동의 선구자였던 문익환 목사가 떠났다. 새벽녘 잠에 덜 깬 아들의 손을 붙잡은 채 선친은 바삐 우이동 쪽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말없이 찾아온 부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영정사진 속 그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해 보였다. 일면 보수적이었던 선친이 문 목사의 죽음을 참으로 안타까워하며 아파했던 모습은 진짜 보수와 진짜 진보의 아우르는 그 무언가를 짧은 시간 보여줬더랬다. 그리고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겨울의 어느 날 김광석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잠시 동안 사랑했던 세 사람이 떠나고, 그들을 사랑했던 누군가들은 여태껏 살아남아 각각의 삶을 통해 그들이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있다.

 

3. 김광석의 삶은 절망스러움이 가득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의 노랫말은 세상을 따뜻하고 희망차게 했으니 웬만한 종교인의 것보다 낫지 싶기도 하다. 김씨의 죽음과 관련한 작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간에 여전히 그의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어 줬으면 한다. 부질없는 생각이겠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예수의 삶을 전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의 근사한 목소리로 찬양을 들을 수 있었다면’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 중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리 허무하게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고, 문 목사처럼 뜨거운 조국 사랑과 통일의 열망을 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며, 이단 ‧사이비 대처에도 열심하는 것이 그들을 떠나보낸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라 믿는다. 

 

4. 세상 노래 조차 절망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여전히 그리운 세 사람을 기억하며….

 

남한산성


소설가 김훈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말의 정치’가 이뤄진 병자호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쏟아지는 호평과 찬사에, 또 묵직한 모습의 영화 <남한산성>은 관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먼저 이조판서 ‘최명길’이 ‘인조’에게 말한 위의 대사는 청과의 화친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 그의 굳은 신념을 고스란히 담아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인조에게 화친의 답서를 쓰기를 간청하는 그를 역적이라며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 앞에서 청의 굴욕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후일을 도모하려 했던 최명길의 소신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삶을 구걸하느니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신의 뜻이옵니다.”

 

청에게 답서를 지어 보내라는 ‘인조’에게 고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의 말은 죽음을 각오하고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곧은 기개를 느끼게 한다. 남한산성의 성문을 열기 위한 청의 공격이 점차 거세지는 가운데, 전국의 근왕병을 불러 모아 끝까지 저항한 것을 간곡하게 청하는 그의 강인한 면모가 드러났다.

 

“청군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데 어찌 밖이 아니라 안에서 서로를 죽이라 하는가!”

 

청과의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적진에 다녀온 예조판서 ‘최명길’의 목을 베라는 대신들의 요구에 “그만들 하라!”고 외치는 ‘인조’의 대사는 화친과 척화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임금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조선의 운명이 걸린 위기 상황에서도 서로를 비난하는 대신들의 모습에 상심한 인조의 고독을 담아내며 깊은 여운을 전했다. 영화의 대사들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자의적 해석에 다름 하지 않는 평들이 난무하고 있다. 정치인들 역시 너나 할 것 없이 ‘팔이 안으로 굽는 식’의 평을 내놓고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나마 도올의 평이다. “역사에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식과 몰상식만 있다”며 “싸워 이길 수 있는 군대와 식량이 있으면 싸우는 것이 상식이요, 싸울 수 있는 아무런 기력이 없으면 화해하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말한 부분. 그런데 감독은 예상과는 다르게 “척화파와 주화파,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상의 정치든 교회의 정치든 간에 ‘아전인수’하지 않기를 바란다.

 

✽ 영화를 보면서 두 기로에서 이리저리 생각을 옮겨가는 모습이 이조판서나 예조판서가 아닌 흡사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다’던 영의정 김류의 소신과 꼭 닮아 있음에 흠칫 놀랐다. 이율배반적 상황에 몸을 맡기며, 그 상황의 모순에 분노하거나 대적하지 않은 채 온갖 개인적인 곤란함을 회피해가는 김류 식의 삶, 그 같은 삶을 살아온 내 안에 그 방식이 더 많이 차기 전, 부디 의롭고 지혜로운 선택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미 많이 늦긴 했지만.

 

그리고 구해줘와 사하바

 

영화매체는 아니지만 얼마 전 종방된 드라마 ‘구해줘’는 종방 이후에 더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다시보기’로 몰아서 봐야겠다는 소리도 자주 들려오곤 한다. 집회 때 아예 드라마 홍보까지 해대고 있으니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세상 이들에게 이 같은 드라마가 이단 사이비를 알리는데 있어 ‘딱’이지 싶은 생각이 든다. 전문가가 보더라도 매회 실존하는 이단들의 등장이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와 감독이 ‘공부를 많이 했구나!’싶다. 배우들의 연기도 지금까지의 종교 드라마에 나타난 어색함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까웠다. 드라마를 다시 보며 각 곳에 숨겨진 이단들과 그 특징들을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이지 않나 싶다. 피해자들의 외침 역시 작금의 이단 피해자의 아픔들을 생생히 전해주기에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드라마의 영역이 우리의 할 일을 빼앗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의 긴장은 있었지만 이런 대중매체들의 관심이 나쁘지만은 않다.

 

또 하나는 본지 사역, 특별히 고 탁 소장의 사역에 모티브를 삼고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진다 하니 이것 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의 입봉작이 흥행에 성공하고 난 이후, 두 번째 영화 역시 종교성이 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며 본지를 찾았다. 첫 영화는 천주교와 관련해서, 그리고 이번 영화는 잘못된 신흥 종교의 비밀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그린 오컬트 영화라 하는데 극 중 박웅재 목사를 배우 이정재가 담당할 거라고 알려왔다. 불교계의 한 신흥 종교의 비리와 폐단을 파헤치는 역할을 어떻게 소화할지 기대도 되지만 반면 상업적으로만 흐르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앞서 언급한 대중매체의 역할이 이번 영화에서도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이단 사이비에 많은 이들이 눈을 떠가는데 동기부여가 될 수 있길 바란다.

 

위에서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최근 대중매체가 이단 등의 문제에 있어서 어쩌면 본지나 한국교회보다 더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짊어져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빼앗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본지 기자들의 펜 끝이 더욱 날카로워질 수 있도록, 본지의 사고가 무뎌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뜨거운 관심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