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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현실 속에서 교육을 한다는 것
권오희 목사
2019년 11월 29일 08시 44분 입력

“저기 철봉을 돌아서 먼저 오는 사람이 쉴 수 있다” 중학교 체육 시간에 자주 하던 놀이? 운동? 아니 벌이었습니다. 저는 체육 시간이 너무 싫었습니다. 키는 컸지만 달리기는 하기 싫을뿐더러 잘하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시간만 되면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들은 여유 있게 뛰어서 벤치에서 쉬면서 우리가 뛰는 모습을 보며 웃기도 했습니다.

▲권오희 목사
제주어깨동무학교 교목

  

우리는 선생님의 호통에 그렇게 열심히 뛴 것입니다. 그렇게 뛰어도, 난 10등 안에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체육 시간에 체력단련이라는 미명 아래 달리기를 자주 시키셨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억울해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때 선생님께서 시키신 일이 불의하다는 문제의식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난 달리기를 잘 못하기 때문에 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신문 기사를 보다가 정말 화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전교 20등까지 먼저 먹어라”는 제하의 기사입니다. 설마?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울산의 한 학교에서 전교 20등까지의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급식을 먹였다는 기사였습니다.

성적으로 인한 학교의 차별은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니지만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에어컨이 빵빵 틀어져 있는 곳에서 보충수업을 시키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았다는 내용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기독 학부모 여러분, 이런 현실에 대해서 언제까지 묵인하고 있을 생각입니까?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달리기 빠른 자는 열심히 달려서 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시나요? 아니면 조금 느린 우린 아이가 이렇게라도 자극받아서 빨리 달려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인가요? 억울하고 화가 나며 안타까운 것은 이 기사를 읽고 있는 기성세대들이 그리고 식당에서 급식을 먹고 있는 교사들조차도 그러한 것을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배웠으니 대부분의 아이는 억울함이 있음에도 왜 억울한지, 그것이 왜 불의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38년 된 병자와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 연못은 놀라운 기적을 베푸는 장소였습니다.

첫 물이 동할 때에 그 연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낫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물에 첫 번째 들어가는 사람만 어떤 병이라도 나을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그 놀라운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입니다. 경쟁자가 많았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걷지 못하는 사람이니, 팔을 다치거나, 다른 곳을 다친 사람에 비하면 그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은 희박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경쟁자들이 가득한데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이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요? 달리기 1등을 할수 있는 아이들 외에는 인정받을 길이 없습니다.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기회가 균등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정말 열심히만 공부하면, 균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사실 진실하지 않습니다. 정말 자신이 택하고자 하는 직업을 원하는 대로 택할 수 없습니다. “네가 억울하면 성적을 잘 받으면 되지 않느냐!” 식의 이야기는 억울하면 달려! 잘 달리면 너는 쉴 수 있다는 식의 악몽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들 그리고 교회학교 선생님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유독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민첩한 아이들이 있고, 발이 빠른 아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학습이든, 생각이든, 신앙이든 모든 부분에서 느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조급해하는 경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아이 중에서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한다고, 기도하지 못한다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의 강요로 예배당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예배드리는 태도가 왜 그 모양이냐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 이유와 애절함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때로는 아이들에게 “어서 빨리 달리라”는 강요 이상을 못 벗어날 수 있습니다. 꼭 손을 들어 찬양해야 할 이유도, 부르짖어 기도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마다 시기가 있습니다. 모든 교육의 시작과 끝은 기다림입니다.

저도 교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기독교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지만 저의 기준으로 아이들을 평가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제 모습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동역은 남들보다 조금 느린 모습은 기다려주고 잘하는 부분을 지지해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육과 사회구조에서 불의하게 일어나는 부분에 대해서 잘못되었음을 알려주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실패자라고 느끼거나 쓸모없는 자라고 여기지 않도록 시각을 열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하신 뜻(엡2:10)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 어른들(부모, 교사)이 있다면 오랫동안 못 달려본 아이들도,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도, 심장이 약하거나, 체력이 약한 아이들도, 암기력이 떨어지거나 집중력이 적은 아이들도 자신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그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원망하기보다는 “주여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아이들로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