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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이 머무는 리더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
이상갑 목사
2020년 01월 31일 08시 53분 입력

Q
목사님! 해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회 봉사를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내가 섬기는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봉사하다가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마다 ‘아무런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처를 받지 않았을 텐데’라는 마음도 들어요. 또 저처럼 부족한 사람이 무슨 보탬이 될까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산본교회 담임
청년사역연구소 대표


A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리더십들의 고민은 내가 서 있는 리더십의 자리, 섬김의 자리, 헌신의 자리를 꼭 지켜줄 필요가 있을까를 고민하곤 합니다.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고민도 합니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모세의 고민은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 양쪽 모두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공공의 적이 되었다고 느끼곤 합니다. 한때 함께 가족으로 지냈던 바로는 강력하게 모세를 공격하며 제거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것입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제국의 논리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습니다. 제국의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 있는 곳은 언제나 차가운 겨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떨까요? 모세의 출애굽에 대한 제안은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의식에 찌들대로 찌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 모세를 원망하고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비난하고 비판하는 화살을 쏘곤 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출6:9) 백성이 보는 것은 이상이 아닌 눈앞에서 경험하는 차가운 현실입니다.

당장 먹고 마시고 자는 것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작은 것에 마음이 상하였고 가혹한 노동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노예 의식에 찌든 그들의 관점은 자유가 아닌 의식주의 해결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배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리더의 자리에 선 모세의 고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 타락하거나 지나치게 인본주의로 흐르면 의식주의 문제, 생존의 문제를 알기에 그것에 대해서 직면시키기를 회피한다는 것 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우실 것이라고 선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분석하면 모세 때문에 근로시간만 늘어난 것입니다. 모세 때문에 복지가 위축되고 축소된 것입니다. 모세 때문에 권력의 희생양으로 권력자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정말 모세 때문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모세를 심층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모세도 원치 않았습니다. 모세가 생각하기에도 대가 지급이 너무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 자리가 출애굽 지도자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셨다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바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척받을 것은 뻔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따져 물은 것입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5:22)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로 화려함 속에 지냈던 모세가 돌아와서 바로에게 출애굽을 요구했을 때 왕궁의 기자들이 작성한 애굽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모세 기획 시리즈로 대서특필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1보: 모세 40년 광야 생활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다. 2보: 모세, 애굽에 출애굽을 요구하다. 3보: 모세의 횡설수설 그것이 알고 싶다.” 모세 자신도 반복하여 “어찌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는 말속에 자신의 심정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학대당하는 이스라엘 동족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출애굽 지도자의 자리에 왜 하필 나인가 하는 것이 그를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너무 힘들 때마다 묻곤 합니다. “어째서 나인가?”, “왜 나인가?”, “꼭 나여야 하는가?” 리더의 자리란 부담스럽고 힘든 자리입니다. 긴장과 갈등, 스트레스가 늘 교차하는 교차로가 리더의 자리인 것입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묻습니다. “왜 하필 그들을 향한 나인가요?” 출애굽을 요구하는 위치에 서 있었던 그 자리는 모세조차도 고통스러운 자리였고 부담이 컸던 자리였습니다. 그가 그 소명의 자리에 섰을 때 그를 처음 맞이한 것은 박수갈채가 아니라 백성들의 정서적, 영적 공격이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21)

놀랍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신 모세를 향한 비난과 비판과 비방이 첫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그런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으면 그는 애굽의 핵심 권력자로 부, 명예, 권력이 보장된 요즘 표현으로는 “엄친아”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했다면 그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일생 광야로 나가지 않고 왕궁에서 화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고 부르셨고 그에게 소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소명이라는 것은 모세의 인간적인 열심이 아니라 모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받았기에 그는 편안함의 자리에 안주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끊임없이 모세를 충동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왕을 향한 출애굽의 요구” 이것은 애굽인의 관점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그것은 아름다운 순종이었습니다. 모세의 순종은 민족과 역사 앞에서 결코 후회함이 없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을 잘 알았습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리니”(출6:7)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심의 은혜는 노예 의식에 찌들대로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력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언약에서 출발한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그분의 지시하심, 인도하심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칭찬을 듣거나 복 받기 위해서 리더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리더의 자리란 수없이 많은 공격의 불화살이 날아다니는 자리입니다. 리더의 자리란 오해와 모함과 비난, 비판, 비방이 난무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상처받기를 거절해야 합니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합니다.

상처를 넘어서서 소명을 감당하려면 결국 인간적인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이 자리해야만 합니다. 오늘도 기억해야 합니다. 리더의 자리는 그 자리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복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기회를 얻은 것이고,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경험되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