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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현대종교 | 탁지원 소장 takjiwon@hdjongkyo.co.kr
2020년 05월 01일 09시 50분 입력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장 3절)

어린이와 이단

이단 교육은 어린아이들에게도 필요하다. 아이들 포교조차 예외를 두지 않는 이단은 때로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등을 운영하면서 지역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고, 초등학교 앞에서는 학용품과 선물 공세로 접근하기도 한다. 캠프나 모임을 통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은 기본, 심지어는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영향력을 아이들에게 나누고자 사범 대학과 교육 대학에 입학하는 이들도 있다 하니 무엇을 생각하든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탁지원 소장
본지 발행인

  

좀 더 언급하자면 학부모 대 학부모로 포교하는 수법이라든지 최근 교육 트랜드 중 하나인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은데 여러 상황 때 문에 어려워하는 부모들에겐 저렴한 가격 등의 방법으로 원하는 것들에 박자를 맞춰주기도 한다.

20여 년 전부터 초등부 교역자와 교사의 문의와 상담을 받으며, ‘어린이와 이단들’이란 제목으로 몇 번에 걸쳐 집중 취재를 했었다. 지금도 5월이면 ‘가정과 이단’에 대해 고민하곤 하는데 가장 마음이 가는 것이 아이들의 이단 문제다. 집 밖으로 나서는 아이들에게 ‘낯선 사람 조심하고, 차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면 영적 낯선 사람과 영적 길 조심의 이야기도 나눠주기를 바란다. 감사한 것은 여름성경학교 등을 준비하면서 이단 교육을 한번 시도해보겠다는 이들의 관심 어린 연락을 받고 있어서다.

아이들에게도 이단 교육은 가능하다. 민감하지 않고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평생 그 영혼을 지켜낼 수 있는 대처가 될 수 있다. 문제가 있다면 “과연 아이들에게 이단 교육이 가능할까?”라고 생각하는 교사와 어른들의 사고가 문제다. 이번 호에 다시 어린이 관련 이단 문제를 기획한 이유다.

✽ 아이들은 순수한 맘과 정성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데 가르치는 교역자와 교사가 아이들의 열정과 열심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가르침이 과연 온당한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혼란스러운 때이나 분발할 것도 많은 5월이다.

언론과 이단

1. 언론에 관해 이야기할라치면 재작년 썼던 글이 떠오른다. ‘언론이든 종교든 간에 대개의 보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키려다 보수를 위한 보수가 되고, 진보 역시 역사와 사회적 의식은 풍부하나 자긍심이 교만이 되어 문제의 본질을 잃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명예가 실추되지 않고, 매너리즘에도 빠지지 않도록 다각도의 시선을 안고 문제를 바라보며 진일보할 수 있는 언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과 더불어 종교 언론이기도 한 본지를 향해서는 언론의 역할에 더 충실해야 하는가? 또는 종교문제에 우선해야 하는가의 고민을 나눴더랬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종교와 언론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지혜의 충만을 기대하고자 하나 ‘쉽지 않음’은 여전하다.

‘한 우물이라도 잘 파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어렵더라도 모든 일을 잘 감당토록 더 노력해봐야 하는 건지?’의 부분이다. 아직껏 그 답을 찾진 못했으나 다른 건 몰라도 이단과 언론 관련 문제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하기에 이번 호에 한 번 더 언론과 이단의 문제를 다뤘다.

2. 지난달 반론 보도와 정정 보도 관련한 재판과 언론중재위원회(이하 언중위)의 조정과 심리만 다섯 차례나 있었다. 판사들도 예외 없이 마스크를 쓰고 진행되는 진풍경 속의 재판에서 ‘기독교복음침례회(이하 기복침)’, ‘기쁜소식선교회 신자들의 테러 사건’, ‘그리심산기도원교회 사건’ 등이 다뤄졌다. 특히 이번엔 평소 다퉈왔던 명예훼손 사건보다는 정정 보도와 반론 보도 재판이 대부분이었음이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언론의 역할 중 반론 보도의 공간은 정정 보도와는 다르게 넓게 열려있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정정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즉시 반론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입장을 전하고자 애쓰거나 정정인지 반론인지 모를 모호한 내용의 준비서면 등을 제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법무팀이 활동하는 이단도 많기에 법의 허점을 최대한 노려 문제를 풀어가기도 하는데 그 때문에 본지는 반론 보도에 있어서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는 편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일반 언론들 대부분은 다투기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반론 보도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인진 모르겠으나 상대방의 입맛대로 정정과 반론을 게재하며 백기 투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같은 일이 6년 동안 당연시되었으니 더는 그들 정당성의 획득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고, 또 그러한 전례로 인해 사실과 진실 아닌 것이 가짜뉴스와 맞물려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러기에 지금껏 정정 보도는 힘이 달리고 물질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다투고자 노력하고있고, 반론 보도 역시 마지막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또 다듬고 수정하고 있다.

지금껏 수많았던 소송 중에 특히 ‘하나님의교회’가 기억에 남는다. 거의 매일 고소를 당하면서 지긋지긋하게 소송을 벌이었던 단체여서다. 그러나 최근 ‘하나님의교회’를 넘어선 이들이 있으니 ‘기복침’이다. 그들의 언론을 대하는 방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느 언론도 예외 없이 그들 관련 문제를 제기하면 반드시 법적인 소송과 언중위 신청으로 갚고야 만다. 본지도 6년간 그들의 문제 제기로 인해 법원과 언중위를 밥 먹듯이 다녔다(언중위가 2014년에 처리한 1만 9048건의 조정 중 1만 6117건 (84.6%)이 기복침과 관련된 기사인 것으로 밝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언중위 창립 이래 가장 많은 수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언론 길들이기’, 내지는 ‘언론에 재갈 물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4월, 1차 조정 기일 때 언중위에 “세월호 사건 이후 6년 동안, 그리고 수십 년 전 선친이 활동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의 신청과 더불어 고소, 고발을 되풀이하는 신청인의 관행과 문제 제기로 인해 심적, 물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기복침’ 쪽이 아니라 본지이며,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악의적인 언중위 신청 등을 제기하는 ‘기복침’을 보며 무조건적인 이의 신청을 거르는 장치 또한 언론중재위원회가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지 않겠나?”라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무튼 반론과 정정에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백기 투항하는 철없고 못난 언론들을 보며, 본지만이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다퉈보고자 한다. 그것이 본지가 존재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3. 그래도 때로는 제대로 된 기사 하나 없이 광고비로만 먹고살기 위해 언론을 운영하거나 이단을 이롭게 하는 몇몇 기독 언론보다는 세상 언론이 더 낫지 싶다. 나름 그들만의 소신을 갖고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하려 애쓰는 열정이 넘쳐 보여서다(단지 시청률에만 의존하거나 취재원을 ‘을’로 생각하는 ‘갑질’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특히 이번 코로나19와 신천지 문제를 접하면서는 웬만한 이단 대처 언론보다 나은 그들의 기사를 접하고는 부끄럼이 적지 않았다.

물량, 역량, 취재력을 다 갖췄으니 그것이야 어찌할 순 없지만 그래도 기독 언론이 세상 언론과 다른 장점을 발휘할 수는 있을 텐데 그마저도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듯하다. 정보력 부재에 허락도 없이 원자료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도덕적 불감증, 그리고 이단과 이단성 있는 단체의 옹호를 부끄럽게 생각지 못하는 모습은 세상 언론과 비교하기에도 창피할 뿐이다. 부디 코로나19의 극복과 더불어 한 걸음씩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는 (본지를 포함한) 기독 언론의 극복도 기대해본다.

현대종교 클라쓰

무릎 한번 꿇는다면 세상이 조금은 편해질까. 삶을 포기하지 않고,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약자로 사는 삶의 서사이다. 그렇다고 가진 자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주저앉진 않는다.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오롯이 낼 뿐이다. 부정한 세력이 판치는 더러운 사회에서 무엇도 그의 삶에 관여할 수 없고 그를 속박할 수도 없다.

최근 인기리에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던 웹툰 ‘이태원 클라쓰’는 소수의 청년으로 이뤄진 작은 식당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렵기만 한 사회적 벽을 넘어 결국 꿈꾸고 바라던 것들을 이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그들 사업의 원칙은 인간적인 신의와 배려, 그리고 믿음이었는데 그 도전은 현실의 높은 장벽을 뚫기엔 버거워 보였으나 결국 그 꿈을 이루고야 만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초라해 보일지라도 이 땅에는 땀과 눈물 흘리면서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며 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근사한 일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싶다. 본지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교만일진 모르겠으나 그래도 오랜 기간 뚝심 있게 버텨온 바윗돌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돌 같이 깨지지 않는 사역이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뚜벅뚜벅 잘 걸어왔으니 조금 더 걷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본지는 이번 코로나 사태에도 여러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랜 시간 연구하고 보존한 자료들을 귀한 원동력으로 삼아 많은 언론과 교회에 나눌 수 있었다. 가끔 얼치기 사역자들이 허락과 출처도 없이 본지 자료들을 마음대로 사용했기에 맘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세월호 때와 국정농단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본지의 헌신과 섬김이 문제들을 풀어가는 작은 열쇠가 되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본지는 조금 편히 살겠다고 비겁하거나 무릎 꿇고 살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그분만을 바라보며, 여전히 좁은 길을 택해 사는 일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본지 공동체를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현종 클라쓰’라 한번 부르고 싶다. 그 삶이 부디 앞의 청년들처럼 아름다운 성공으로 안착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주 잠깐, 한 번만이라도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순수했던 때로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질없는 소망이긴 하나 방법이 없진 않다. 어른의 몸으로 살고는 있으나 노력한다면 마음만큼은 충분히 그리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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