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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현대종교 | 탁지원 소장 takjiwon@hdjongkyo.co.kr
2022년 07월 01일 08시 46분 입력

태어나 오랜 시간 살아온 서울과 경기 말고도 제2의 고향이 몇 있다. 그 중 가족이 거하는 김해와 익산은 삭막한 서울과는 다르게 살가움과 따뜻함이 있어 늘 좋다. 최근 김해에서 있었던 일이다. 소소한 일이기에 지면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멋쩍긴 하나 여태껏 그렇게 해왔으니 담아본다. 예나 지금이나 아파트 이웃 간의 교제는 쉽지 않은데 가족이 사는 아파트는 유독 그 같은 어색함 없이 승강기나 아파트 마당에서든 간에 살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동네 목욕탕에서도 그렇다. 김해에 내려갈 때마다 찾는 목욕탕이 있어 이번에도 가게 되었는데 탕 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마다 하나같이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어른에 대한 예우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몸에 배어 있는 듯한 그 모습에 처음엔 당황하기도 했으나 생각해보니 우리네 정이 아직까진 사라지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그날의 소소했던 감동과 여운이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글과 말씀에 대한


여전히 서툰 창작의 숙제 앞에 매월 ‘참고’와 ‘벤치마킹’이 그나마 버팀목이 되고 있다. 가끔은 표절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도 있으나 표절만 아니라면 참고와 참조, 그리고 벤치마킹은 작지 않은 도움을 준다. 글 쓰는 재주도 없고, 머리도 둔하기에 남의 창작을 참고해서라도 다시금 재생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창작의 삶을 긴 시간 동안 안아왔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상식과 법에 어긋나지 않는 재생산이 늘고 있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진 않는다.

설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목회자의 설교 표절이 표면화되고 있는 작금에 어렵더라도 고 옥한흠 목사나 김동호 목사의 이야기처럼 설교를 준비하는데 힘겨울 때도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영적 노력의 결과물로 행복하고 힘 있게 살아갈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쁜 맘으로 말씀 준비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이 어렵다면 한 주간 (생산이 아닌) 지혜로운 재생산을 통해서라도 기도하고 씨름하며 준비해야 할 것이다. 부디 사회와 교회 정치나 세속적인 엄한 것에만 관심을 두고 성도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길 바란다.

* 표절은 기사에서도 다르지 않다. 언제부터인가 본지 기사들을 참고한 건지, 또는 표절한 건지가 명확지 않은 짜깁기 기사가 늘고 있다. 지금까지는 넓은 아량으로 지켜보고만 있었으나 더는 불합리한 일에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깊어지고 있다. 다른 이들의 창작의 고통과 현장을 두루 넘나드는 취재를 통한 노동의 열매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밥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길 강력하게 요청한다.

세상과 삶에 대한

열심히 준비하고 작성한 내용이 월간지를 통해 한 달에 한 번 전해지다 보니 좀 더 빠르게 세상에 빛을 보는 언론에 밀리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도 언론에 몸담고 있으니 늦게나마 진심의 맘을 어떻게든 전할 수 있어 좋고, 좋은 이야기가 동료 언론을 통해서 나뉘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최근 여러 언론이 주목하고 기사화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방영 중반쯤 됐을 때였다. ‘또 드라마야?’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웬만한 우리네 삶보다 요즘은 드라마가 주는 감동과 기쁨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는 것과 세상 것이라고 불경스럽다고 얕보지만 말고 부디 세상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자고 했던 것을. <나의 해방일지>와 같은 기간 대에 방영됐던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 이야기를 더한다면 위의 이야기가 어설픈 주장만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명확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옵니버스 형식으로 제작된 드라마 내용 중 하나의 에피소드에 다운증후군 장애인 배우가 직접 출연해서 여태껏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독자들도 알고 있으리라. 다그치지 않고, 무겁지 않게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현실감 있게 담아낸 방송으로 인해 다운증후군과 장애인에 대한 세상 관심의 마중물이 됐다. 더불어 장애인 배우가 장애인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통로를 마련했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장애인 배우의 모친은 장애인 관련 관심이 생각보다 너무 커서 참 놀랍다며, 오랜 기간 장애인 처우 등의 문제를 위해 노력했는데 드라마 한 편이 주는 힘이 너무도 크기에 고맙기도 하나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신천지에 대해 수십 년 연구, 취재를 하며, 본지에 기사화한 것보다 ‘PD수첩’ 등의 한 시간짜리 방송이 많은 이들에게 더 넓게 다가서는 모습을 보며 허무한 마음과 동시에 세상 방송이라고 내쳐서는 안 될 필요를 느꼈던 일이다. 이렇듯 이단 대처나 장애인의 삶의 개선과 관련 제도 등을 마련키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했으나 방송을 통해 그 같은 영향력이 더 크게 자리 잡을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던가? 그러니 세상 것들을 그저 불경스럽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작금의 시대에 그러한 것들과 어떻게 손잡고, 또 벤치마킹, 습득,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치 않나 싶다. 겸손과 배움은 절대로 손 놓아서는 안 될 덕목이지 싶다.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와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매주 챙겨 보게 됐는데(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마시라. 세상의 것에만 매여 사는 인생은 아니고, 매일 「현대종교」는 아침과 저녁 두 번씩 말씀을 나누고 실천하는 삶을 잘살고 있으니 말이다.^^). 내용 중 주인공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내 맘을 묶어 두고 있다.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 관계, 고작 이런 걸 가지고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에요? 나 여기 왜 있어요?”라는 대사 때문이다.

국내외로 유명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내용을 넣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설픈 해석으로는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 우리 안에 항상 가둬놓고 절대자인 그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좀 더 넓고 깊은 기도의 제목과 그에 따른 삶도 필요할 텐데, 주변의 작은 안위에만 매달려 사는 것은 아닌지, 드라마에서처럼 우리 각자와 세상의 해방에 대해, 사랑하는 이들과 하나님에 대한 추앙에 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텐데 말이다. 더불어 세상 삶에 관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해방을 꿈꾸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주어진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예의라는 생각을 이제라도 하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 위의 드라마 제목 중 ‘블루스’라는 단어는 삶이 아픈 사람들이 더는 아파하고 싶지 않아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사람마다 아픔 없는 이들이 없기에 어쩌면 아프지 않으려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종교」도 많은 이들이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데 독자 제현 역시 본지가 아프지 않도록 위로, 기도해주고 있으니 서로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주일학교 때였을까,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를 죽여라!”고 외쳤던 일을 보며, 어린 마음으로는 이해 못 했던 바가 컸다. 인간 군상의 양면성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된 때였다. 이젠 이야기로만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경험하며 살고 있다. 예수 때의 군중이나 지금의 사람들에게 바뀐 것은 없다. 물론 양면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많아지긴 했으나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몸부림, 딱 거기까지이다.

아울러 사람 간의 예의와 배려에 대해서도 그간 자주 언급하곤 했는데 대면이든 비대면 때이든 간에 그 두 덕목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팬데믹을 겪으며 소셜미디어 등의 비대면이 편해져서인지 지쳐있는 주변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안아주고 위로하기보다는 어쩌면 잘 모르는 이들과 너무 멀리 있는, 너무 많은 사람에게 연일 ‘좋아요!’로 소통하는 일이 다른 무언가를 떠나 얼마나 지치고 고달픈 일인가. 그러한 것도 예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인가? 또는 사람에 대한 배려인지 여태껏 도통 모르겠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뭐라 할 수만은 없겠으나 삶이 고프고 위로와 응원이 필요한 이들보다 엄한 사람들의 일상, 허울과 가식에 기대는 일이 많아지고 있기에 답답한 마음을 굳이 숨기고 싶진 않다. 하루 세끼 끼니에까지 사진 찍고 ‘하트’와 ‘좋아요!’를 날리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하는 건지. 정말 응원과 사랑이 필요한 이들에게도 그럴까 싶고, 사랑하는, 내지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과의 소통도 그러할까 싶다.

때로는 세상의 변화와 발전은 득이 아니라 독이 되기도 한다. 그러기에 지친 사람들이 이단의 위로와 섬김을 제대로 검증하지도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따뜻함만을 보고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떠나버리고 있는 것이리라. 모든 것이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적어도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예의만큼은 잃지 않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고 깊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 할지라도 진심과 예의가 더해지면 소소한 기쁨은 물론 세상 살맛 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탁지원 소장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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