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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현대종교 | 탁지원 소장 takjiwon@hdjongkyo.co.kr
2024년 07월 05일 09시 17분 입력

군중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려고 하자 두 사람은 옷을 찢으며 무리 틈으로 뛰어 들어가 제지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숭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거라며.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추앙받는 것은 박해받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지 싶다(사도행전 14장 11~15절, 『매일 성경』). 

 

비교할 수 없는

 

‘드라마란 무엇인가?’라는 모 기자의 질문에 최근 인기 급상승 중인 인기 작가가 (오래전 기억을 꺼내어 들며) 답했단다.

‘떡볶이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주말드라마를 보느라 떡볶이 포장을 제대로 못 하던 풍경과 그 옆 다른 가게 사장도 드라마를 보느라 손님이 매대를 들여다보는 것도 모르고 있던 일들이 뇌리에 남아 있다’고. 그러면서 ‘시름 많았던 하루를 단 한 시간이라도 잊게 해주는 것,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는 것’이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면서 그도 그러한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세상 사람들과 우리네 믿는 이들의 삶을 비교하는 일이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과 사고가 교계와 교회에 만연한데, 반대로 세상에는 종교인들보다 더 거룩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차라리 세상 사람들의 삶이 부러워서인지, 아니면 우리의 자긍을 찾고자 경각심을 나누기 위해서인지 이제는 글을 쓰면서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버거운 일들로 인해 지치고 힘이 들어도 우리네 삶을 위로해 주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꾸거나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말씀이 늘 우리 옆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테다.

세상 것에 취해 너무 멀리에 두거나 오랫동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든 다시금 돌이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들이 나름의 은혜와 감동이 된다고 해서 신앙의 자긍심과 우리의 신앙, 믿음, 말씀과는 바꿀 수 없는 자존심 역시 잃어서도 안 될 일이다.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뜻하는 ‘원칙’이란 단어의 뜻과 전혀 다르지 않은 말씀과의 동행 역시 더도, 덜도 아닌 늘 하나님 명령에 준행하며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삶, 바로 그것이지 싶다.

 

물질과 응대

 

집회 초청을 받을 때마다 초청 교회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고, 기대도 크다. 어떤 이유로 이단 대처 강의를 하게 되었는지, 내지는 교회의 상황과 초청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등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런데 들을 수 있는 내용은 기본적인 요청의 변들과 더불어 사례의 원칙뿐이다. 강의로 인한 열매를 생각하기보다 물질 문제의 염려가 느껴질 때면 힘이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것이 우선순위는 아닐 테나 어찌해서 들어보면 교회 사례의 인색한 원칙과 변명이 전해진다. 가끔은 피초청자의 원칙도 들어봐 주면 좋으련만 그것은 항시 ‘외’로 둔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섬김의 이야기라도 어렵게 할라치면 강사가 물질을 밝힌다고 눈치를 주거나 더 나아가 집회 자체를 아예 취소하는 일도 있기에 더는 우리의 요구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대부분 대형 교회들의 초청과 피 초청의 관계는 강산이 3번이나 바뀌었는데도 달라진 것이 없다.

반대로 대부분 개척 교회나 작은 교회들의 집회 현장은 강의를 허투루 준비하는 일이 결코 없을뿐더러 강사에 대한 배려도 깊다. 누추하고 어려운 자리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겸손으로 인해 은혜를 끼치러 왔다가 도리어 은혜받고 돌아가는 시발점이 된다.

(초청에) 강사가 감사해야 할 일인데 작은 교회에 와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고 하니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다. 그 같은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데 어느 강사가 최선을 다해 집회에 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그네를 제대로 섬기고 위로할 줄 알며, 배려와 예의를 갖춰 집회를 통한 열매를 기대하는 지혜와 순수함을 보노라면 위에서 언급한 물질 문제는 이곳에선 논외가 된다. 세상에 잘 알려진 대형 교회들과 분명하게 나뉘는 차별점이다.

혹여 이러한 이야기가 몇몇 교회로 인한 실망 때문에 쉽게 이분법적으로 나눠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이 정말 그러한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네 교회들이 좀 더 넓은 의미로서의 섬김과 배려, 그리고 지혜와 건강한 원칙들로 자리 잡아갔으면 한다.

 

상담

 

상담은 공개 상담과 비공개 상담으로 나눌 수 있을 텐데 민감한 주제의 특성상 이단 상담은 비공개 상담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때로는 비공개를 공개로 전환하여 함께 문제를 풀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문제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이 교회가 해야 할 당연한 소명이자 원칙이지 싶다.

문제는 그 같은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회는 이단 문제이든 어떤 문제든 간에 관련 사역자에게만 도움을 요청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문제들을 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도의 이단 상담이 있을 시에도 이단 상담소나 본지에 연락해 보라고 전화번호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교회에서 문제해결의 의지와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 그다음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도록 하는 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에 좀 더 마음 문을 열게 하는 신뢰로 이어질 것이다.


모 교회의 집회 후 상담 때의 일이다. 최근 상담은 많은 내담자로 인해 시간이 길어지곤 하는데 그만큼 이단 관련 피해가 늘고 있어서이지 싶다. 그날도 오랜 시간 상담이 진행됐다. 목도 아프고 피곤이 밀려오긴 하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담까지가 집회 사역의 마무리이고, 본지의 당연한 일이여서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주변에 교회 관계자들이 보이지 않기에 힘이 빠지곤 한다. 텅 빈 예배당 안에 상담자와 내담자들만 남아 있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날따라 화를 다스리기가 어려워 죄 없는 내담자들에게 괜한 넋두리를 해댔다.

“성도들이 이단 문제로 아파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해결점을 찾고자 하는데 교회의 리더들이 이러한 문제에 관심도, 함께 풀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면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맞나 싶다. 앞으로는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교회에 도움을 요청해서 교역자들과 리더들이 이단 문제에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교회 공동체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외침이기도 했다.
 

최근 데이비드 차 사건이 터진 후, 드러난 문제들을 제대로 살펴보고자 하는 이들이 늘고 있으나 그가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등 억울한 부분이 많다며 옹호하는 소리도 적지 않다. 그의 말씀을 계속 들으면 안 되냐는 문의도 많다.

결국 가스라이팅은 차씨가 아니라 되려 옹호하는 이들의 것이 되어버렸다. 신앙의 원칙 중 하나는 분명코 사람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사는 것일 텐데 앞의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추앙받는 일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 죽고 그분만 살게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이라 확신한다.

 

 

▲탁지원 소장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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