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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현대종교 | 탁지원 소장 takjiwon@hdjongkyo.co.kr
2025년 04월 04일 08시 40분 입력

공의란 공평과 정의, 그리고 의로운 도의를 의미하는 것일 터, 그러기에 뜻도 모른 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저주하고 훼손하며, 폄하하는 곳들에 이 같은 언어가 소비되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신앙을 빗대 가짜뉴스를 남발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교회다

소 선지자(12명) 중 한 명인 아모스는 기원전 760-755년, 남 왕국 유다 출신이었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사회적 부정과 종교적·도덕적 퇴폐를 신랄하게 규탄하고 하늘의 심판이 내릴 것을 예언했던 아모스는 부유층과 빈민층 사이의 불균형이 커지는 것에 대해 경고함은 물론 사회 정의와 신성한 판결 등에 관심이 많았다.
 

말씀보다 엄한 것들에 더 관심이 많던 청년 시절, 그래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명분 없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부모님의 애절한 신앙과 사랑 덕분이지 싶다. 사춘기의 자식들이 봐도 늘 생사를 다투며 치열하게 살던 선친과, 선친 포함 5명의 남성을 건사하던 어머니로 인해 적어도 기본적인 믿음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더랬다.

또 하나는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섬기던 교회에서 개인의 안위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문제를 염려하며, 부조리들과 싸우기 위해 무던히 애쓰던 동료들로 인해 정의와 공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씀이 가슴 깊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선친이 늘 되뇌던 이사야서와 사랑의 선지자라 일컫는 호세아서의 말씀도 좋았으나 혈기 왕성했던 시절에 의롭게 살기를 간구했던 이에게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기독 청년들에게 격려가 되기에 충분했던 이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하나님을 수식하는 이름 중에 ‘공의의 하나님’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해 믿음의 실마리로 자라게 된 것이.

 

물론 그 같은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이번 칼럼의 방향을 정한 것은 아니다. 최근 정치 집회들이 만연한 중에 모 극우 집회의 단상에 아모스서의 말씀이 걸린 것을 보고는 평생을 의롭게 살고자 되뇌던 말씀이 누군가에겐 전혀 달리 해석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어서다.

작금에 아모스 이야기를 꺼내니 주변에 같은 생각으로 거룩한 분노를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구약학자 김근주 교수는 “극우 집회에서그들이 아모스 5장 24절 말씀을 구호로 삼고 있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며, “1970~1980년대 군사독재랑 싸울 때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아모스 5장 24절인데, 이게 세이브코리아 손에 들려 있는 걸 보고 정말 충격이었습니다만 일단 이 양반들이 이런 구절 발견한 거 좋고요.

그럼 저는 묻고 싶은 게 거기 나오는 정의와 공의의 의미가 뭐냐. 아모스 5장에서 아모스가 촉구했던 게 뭐냐 할 때, 명확하게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 약자를 위한 정의, 힘든 사람이 짓밟히는 현실에 대한 정의가 구약성경이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싶어요”라고 했다.

그 역시 혼란스러운 사회와 종교의 틀 안에 갇혀 있으나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말씀과 삶이 정치 집회의 현장에서 소비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정치와 종교, 그리고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어디에서든 결코 곡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 교수는 “같은 맥락으로 그럼 관건은 뭐냐.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정의가 뭐냐. 성경이 말하는 공의가 뭐냐. 이게 우리가 진짜 제대로 다루어 볼 주제이다 싶어요.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극우 집회에 참여하는 분들께 부탁하고 싶어요. 성경 읽으시면서 정의와 공의로 구약성경 검색하셔서 이 단어들이 어떤 맥락에 쓰이고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를 다시 공부하시라고 권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주간 처치독, 한국교회 극우화 현상 인터뷰 내용 중(2025. 2. 27).

정치가 점점 극명하게 갈리며, 절대적 이분화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제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당연히 교회이지 싶다. 다수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중립함도 때로는 필요하겠으나 교회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예언자적 소명이기에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온당하지 싶다.

성도들의 눈치만 보며 전해야 할 것을 전하지 못하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지도자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교회가 정치에 앞장설 수 없으나 정치가 잘못될 때 그것을 바로잡아줘야 할 테지만 신앙인지 정치인지를 전혀 알 길 없는 이들의 행태와 더불어 건전치 못한 선전과 선동에 흔들리는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노라면 과연 어느 것이 진짜 믿음이고, 진리인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오래전 선친을 통해 진정한 진보와 진정한 보수는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크게 동의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적, 종교적 진보와 보수에 대해 의심이 증폭되는 이유는 진짜 진보와 보수가 사라져서는 아닐까. 건강한 대척점이 사라지고, 증오와 혈투만이 남아 있는 작금의 시대에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 살아야 하는가?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라는 노래가 있다. 암울했던 독재 시대에 애타는 마음으로 부르던 김민기의 노래인데 그때는 싸워야 할 명분이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선과 악의 잣대가 불분명한 채, 남의 것은 다 잘못됐고, 자신들의 주장과 신앙만이 진리라 여기며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여전히 광화문과 여의도 등의 집회 현장에서는 그 같은 사랑을 찾기가 어렵다. 다툼을 위한 다툼만이 난무할 뿐이다. 그동안 ‘이 또한 지나가겠지!’라는 말이 작은 위로가 되었지만 이젠 그것을 뛰어넘어 평화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를 부디 포기치 말고 나로부터, 그리고 우리로부터 해야 할 일을 좀 더 고민하고 기도하며, 찾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정답은 여전히 희미해 보이지만 그렇게, 그 같은 마음을 안고 살다 보면 언젠간 귀한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더 버틸 수 있길, 그렇게 그의 의를 구할 수 있길 바란다.

십(10) 행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길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의 미국처럼 한국 사회도 혐오에 중독되어 처참히 두 갈래로 나뉘고 있다. 여러 삶의 현장에서 점점 영화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고,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확산하면서 무수히 여러 갈래로 나뉘고 있는 군중들을 보면서 드는 불안한 생각은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적인지 아군인지 도통 분간조차 하지 못하는 혼란한 상황에 분노와 적대감은 일상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을 어찌 풀어야 할지 허우적대며 살고는 있으나 이럴수록 정신 바짝 차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공의의 말씀을 의지했으면 한다.

아울러 가장 나쁜 선택은 나와는 상관없다는 마음일 테니 침묵하지 말고 한국교회의 산적한 과제들과 더불어 이 땅의 민초들이 다시는 분열되는 일 없도록 해야 하겠다.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수많은 고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극복하며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지혜롭게 잘 해결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라 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기도하며 아뢸 때,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이 같은 일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또 하나의 경각심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교회가 교회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먼저 건강하게 잘 살아가게 될 때, 나라도 나라답게 여러 불안정한 것들을 잘 마무리 할 것이다.

쟁점은 이렇듯 각자의 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와 조국에 있어야 하는데 그간 지켜본바 물질이나 기득권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은 이들과는 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수하에 놓고 있으니 사람에 대한 배려와 예의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와 교계에 위정자나 지도자들이 아무런 욕심 없이 의로운 아모스 선지자처럼, 또한 평생을 건강한 신앙으로 살아온 믿음의 선배들처럼 가엽고 안타까운 군중들을 부디 잘 이끌어 줬으면 한다.

또한 집회 현장에 관해서는 먼저는 그 모임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기에는’이 늘 먼저여야 할 것이며, 절대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과’가 있다면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 파벌과 진영의 싸움이 아닌 진심으로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는지를 확인해 봐야 함도 물론이다. 이것은 흡사 이단 분별의 기준과도 다르지 않으니 그리 적용해 보는 것도 좋겠다.

에서와 야곱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연약한 사람이었기에 실수도 잦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으나 결국은 화해와 회복으로 마무리되었다. 작금의 이런저런 안타까운 소용돌이 중에도 반드시 모든 결론은 화해와 회복으로 끝날 수 있도록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화해의 마음을 품고, 그것을 나누게 된다면 가능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복잡하게 찾기보다는 타인을 악마화하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하기 때문에 혐오가 늘고 있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모든 문제를 혐오 대신 사랑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승리라는 찬양이 있다. 지난번 ‘교회’라는 찬양에 이어 요즘 가장 많이 생각나는 노래(가사)이다.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 줄 아는가.
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힘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결과가 어떠해도 주님만 빛나시고 주님 평안 내 안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승리라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승리라네!’

리(이)미, 다 이겨놓은 싸움에서 마침표는 경계와 예방, 깨어 근신함이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할 테다. 아울러 하나님만 영광 받아야지, 사람이 영광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사이비 목자요! 사이비 정치인일 것이다.


하세월 매우 힘들었던 시절을 살았고, 지금도 다르진 않으나 모든 것 다 하나님께 맡기고, 조금만 더 노력하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기쁨과 감사로 이어질 것이다.

길과 진리 되신 주님 따라 귀한 이 나라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길, 아울러 영적 전쟁과 우리네 삶에서도 늘 승리할 수 있길 바라며…. 여호와 닛시!​

작지만 커다란 힘

올겨울엔 초등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잊히지 않는다. 천안 여명교회 아이들과의 만남이었는데 학부모들까지 초청한 그곳 겨울성경학교 이단 특강은 적지 않은 수가 모였더랬다. 이미 30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아이들을 미혹하는 이단 문제로 인해, 결코 다음 세대의 막내들까지 이단 교육이 빠져서는안 된다고 믿으며 달려간 현장에는 교인들 모두가 함께 준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하여 아이들 강의는 늘 부담 없지 않았으나 그날은 이 교회의 구성원이라도 된 양 즐겁게 참여했더랬다. 요즘 아이들이 워낙 지혜롭고, 나름의 배려심도 있기에 1시간 넘는 강의였음에도 그날 강의는 잘 끝났다. 만남 자체만으로 위로와 은혜가 되기에도 충분했고, 아이들 특유의 소란스러움조차 마치 백색 소음처럼 활력이 됐지, 문제가 되진 않았다.

강의 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폭풍 질문들을 쏟아낼 때는 감사의 마음이 더욱 커졌다. 게다가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해야 할까? (초등학교 1학년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와의 만남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귀한 선물이 되었다. 체구가 아주 작은 아이 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잠깐만 앉아 볼 수 있냐고?’, 그러고는 눈을 맞춘 후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고는 손바닥으로 토닥여 주며 ‘수고 많았다’, ‘고맙고, 기도하겠다’라는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전율과 그간 경험해 보지 못한 평온함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간 받았던 여러 위로와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들은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말을 그간 자주 해왔는데 아이들도 강사의 진심과 간절함만큼은 당연히 잘 알고 느끼고 있었던 게다.

은혜를 끼치러 갔다가 도리어 은혜를 받고 온 그날 집회는 겪어본 적 없는 여러 일들로 인해 부메랑처럼 귀한 선물이 되어 돌아왔다. 앞으로 사역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빚진 맘 갚아야 하는 것 외에 내 인생의 다른 선택은 없지 싶다.

공의의 열매인 회복과 감사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이단에서 피해자들을 건져내는 것만이 회복이 아니라 주 앞에서 거룩함과 의로 섬기는 백성으로 세우는 데까지를 ‘회복’으로, 또한 이단으로 인해 어려움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감사일 수 있겠으나 그 감사를 더 많은 이들과 나누는 삶이 진정한 ‘감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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