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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퍼즐
현대종교 | 탁지일 편집장 jiiltark@hanmail.net
2026년 01월 15일 08시 58분 입력

이단 문제가 발생하면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주로 ‘피해자’만이 고통당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가해자인 이단은 온데간데없고 평온한데, 오히려 피해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감추는데 급급한 모습을 노출한다. 그럴수록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간다.

‘가해자’보다 ‘피해자’

이단에 빠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다! 이단에 잘 빠지는 유형이 있을까? 누구든지 빠질 수 있다! 이단 문제와 피해는 언제 어디서든지 생길 수 있다. 이단의 발생은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마지막 때의 표징이다. 이단 문제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고, 누구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이단에 빠지면,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의 성격을 분석하고, 성장 과정을 조사하거나, 가정 배경을 샅샅이 파헤친다. 당사자의 개인 정보와 자존감은 고려하지 않는다. 분명한 ‘2차 가해’다! 이단에 빠지고 싶어 빠지는 사람은 없다.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라, 원인을 제공하고 미혹한 이단이 문제이고 가해자이다. 왜 가해자인 이단을 나무라기보다, 피해자에게 주홍글씨를 붙이는 일에 더 집착하는지 늘 의문이다.

물론 이단 문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이단 문제가 소중한 사람에게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안타깝지만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둘째, 죄책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피해자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감추지 말아야 한다. 감출수록 문제는 더 악화되기 때문이다. 이단 피해를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믿을만한 누군가에게 건강하게 노출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단 피해 퍼즐의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들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격려와 지원의 대상’이다. 막상 어떻게 도울지 막막하다면, 그저 조용히 곁에 서서, 기도해주는 것이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낫다. 

‘정죄와 분리’보다 ‘치유와 회복’

길 잃은 한 마리 양인가, 아니면 안전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인가? 예수님의 선택은 망설임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단은 물론이고 이단 피해자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림 아래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신천지 논란이 불거졌을 때, 신천지를 탈퇴한 신도들이 6000명 이상이라고 신천지 스스로 밝혔다. 이단 신천지를 떠난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단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깨닫고 도망쳐 나온 수많은 피해자가 있다. 이들 모두 교회로 돌아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탈퇴 후 피해자 대부분은, 교회도 싫고 이단도 싫은 공황상태에 처한다. 이때가 회복과 치유의 골든타임이다. 교회의 진입장벽을 허물고 탈퇴자를 감싸 안지 않으면, 추가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단을 나오면 교회가 아니라, 다른 이단을 찾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신천지와 JMS를 탈퇴한 피해자들이 요즘 허경영의 하늘궁을 찾아간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말씀과 설교 이면에서는, 이단 피해자의 교회 진입을 막거나 분리하고 정죄하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지켜야 했다는 비성경적 명분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이단 피해자와 가족은 ‘정죄와 분리’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대상이다. 길 잃은 어린 양에 대한 배려 없이 이단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

‘교리적 지식’보다 ‘신앙적 상식’

신학적 지식이 풍부한 신학자만이 이단의 교리적 허점을 분석할 수 있을까? 성경에 관한 이해가 깊은 목회자만이 이단을 분별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단을 분별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심오한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평범한 ‘신앙적 상식’이다.

신앙적 상식이란, 첫째, 신격화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라는 상식, 둘째, 이것저것 혼합하고 뒤섞은 이단의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상식, 셋째, 이단 교주가 주장하는 특정한 날에 종말과 심판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상식이다.

신앙적 상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이단에 미혹될 확률은 낮다. 우리는 상식적 신앙의 촉을 신뢰해야 한다. 왠지 낯설거나 혹은 가까운 누군가 이유 없는 친절과 배려가 부담스럽고 이상하다면, 굳이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이상하면 이상한 것이다. 고상한 교리적 지식을 동원해 분석해야 할 만큼, 이단들의 행태는 절대 심오하지 않다.

‘정치적 견해’보다, ‘신학적 원칙’

형식은 분명히 예배이고 설교인데 그리고 복음적인 언어들로 포장되어 있는데, 내용은 지극히 극단적인 정치적 이념과 편향성으로 채워진 경우가 있다. 사랑보다는 증오의 씨앗을 심고, 화해와 화합보다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아무리 나와 같은 정치적 성향과 견해를 가졌더라도, 교회의 전통, 가르침, 예전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은 문제가 있다. 부적절하고 신성모독적인 언행이 있다면,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 돼야 한다. 교회에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신학적 원칙이 있다. 우리가 믿는 성부, 성자, 성령의 신성, 그리고 교회와 재림과 부활에 관한 신앙고백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자신을 신격화하는 이단 교주도 문제이지만, 신앙적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교묘하게 설파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회 지도자는 더 큰 문제이다. 이단의 행태는 그렇다 치고, 정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착취, 예를 들면,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금전적 착취,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성적 혹은 노동력 착취, 사명이라는 명분으로 강요되는 정치적 가스라이팅은, 오히려 죄질 면에서 가중처벌이 필요한 종교적 확신 범죄의 범주에 속한다.

‘종교적 이슈’보다 ‘사회적 문제’

이단의 범죄적 행태도 문제이지만, 우리의 집단 망각이 더 치명적이다. 이단과 연관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교회와 사회의 분노는 들끓지만 이내 곧 식어버린다. 너도나도 나서서 성명서를 내고, 보도자료를 배포해 존재감을 표출하고는, 이내 곧 잠잠해진다. 이단이 문제인지, 우리의 망각이 문제인지 이젠 도통 모르겠다.

2014년 세월호와 유병언 구원파, 2016년 국정농단과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 2018년 만민중앙교회 이재록과 은혜로교회 신옥주의 범죄, 2020년 코로나 지역감염 확산과 신천지, 2022년 일본 아베 신조 피살 사건과 통일교, 2023년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와 JMS, 2024년 기쁜소식인천교회 여고생 사망 사건과 박옥수 구원파, 2025년 통일교와 불법 정치권 로비 등 이단 관련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해오고 있다. 이제 이단 대처는 교회와 가정을 지키는 일을 넘어, 우리 사회를 지키는 일이 되었다. 교회와 신앙인이 이단을 예방하고 대처하는 일은,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책무가 되었다. 이단 문제는 교리적 이단성을 넘어,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도 접근해야 한다.

이단 문제에 관해 교회사적 관점으로 접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교파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교회에서, 교리적인 이단 대처는 쉽지 않다. 여러 교단의 교리적 잣대를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할 때, 주변 사회의 공감과 동의를 얻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중차대한 문제인데, 사회는 교회 안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치부한다. 이단의 비성경적 본질을 폭로하는 것만큼, 사회적 폐해를 노출하는 전략도 효과적이다.

‘이단 분별’보다 ‘복음 실천’

신앙인 모두 이단을 분별하는 전문가가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하나님 말씀 전문가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인의 삶은 간단명료하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다. 복음은 굳이 성경 구절의 행간을 읽고 이리저리 영리하게 분석할 이유가 없다. 그저 성경 말씀 그대로 믿고, 우직하게 살면 된다.

교회의 사회적 순기능이 약화하면서, 이단들은 양의 옷을 입고 ‘선한 사마리아인’ 코스프레를 하며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아무리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반대로 아무리 정통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일을 저지르는 행태를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교회는 이단들보다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 정결한 교회만이 이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단을 분별하는 것보다, 복음대로 사는 것이 우선순위에 있다. 복음을 믿고 그대로 살 때, 이단 분별은 무료로 주어지는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다. ‘무엇이 복음이 아닌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이 복음인지’를 아는 신앙이 이단과의 영적 전쟁을 위한 필수 아이템이다.

‘안심’보다 ‘조심’

이단 피해는 언제 어디서든 발생한다. 이단 문제가 없다고 ‘안심’하기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조심’이 필요하다. 자동차 옆 거울에는 작은 글씨로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이단 피해로부터 안전한 상황이 아니라, ‘아직은’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이단은 우리의 소중한 사람을 순식간에 빼앗아 데려간다. 우리가 하나님 품에 안기거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영적 전쟁과 선한 싸움은 절대 멈출 수 없다. ‘조심이 안심’이라는 원칙을 지킬 때, 이단 대처를 위한 복잡한 퍼즐을 해결할 수 있다.

* 이 글은 『빛과 소금』 2025년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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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본지 이사장 겸 편집장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