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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脫) 하나님의교회, 마음의 감옥을 허무는 일
이현석(가명)
2026년 03월 31일 08시 29분 입력

‘신앙’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감옥


나는 이 글을 통해 세상에 단 하나의 진실을 전하고 싶다. 하나님의교회는 단순히 교리가 다른 종교 집단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와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심리적 감옥’이라는 사실이다. 이 감옥의 잔인함은 그 안에 갇힌 이들이 단순한 피해자로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철저히 파괴된 채,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다시 피해를 호소하는 비극적 순환이 그곳에서 일어난다.

2014년의 어느 날을 기억한다. 전국에 있는 피해자 회원들이 모여 하나님의교회 앞에서 그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내가 마주한 것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신도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위자를 향해 폭언을 퍼붓고, 현수막을 칼로 난도질하며, 경찰과 시위자들에게 정체 모를 액체를 뿌렸다. 그 광기 어린 눈빛을 보면서 나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그것은 ‘신앙의 열심’이 아니었다. 양심과 판단력, 공감 능력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작동 장치가 꺼져버린 ‘집단적 마비’ 상태였다.

우리는 이제 이 현상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그들이 왜 그토록 이성을 잃고 매달리는지, 왜 상식적인 말조차 통하지 않는 ‘심리적 요새’를 구축했는지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교회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그들을 잃었으며, 다시 돌아오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미혹의 문은 ‘교리’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 열린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갖는다. “안상홍과 장길자라는 인물을 어떻게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포교되는 과정을 보면, 사람들은 결코 교리 때문에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그들이 들어가는 문은 성경 구절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취약한 지점에 난 ‘상처’의 문이다.

하나님의교회 포교자들은 철저하게 ‘관계’를 파고든다. 외로움, 실패, 실직, 질병, 사별, 혹은 해소되지 않는 가족 간의 갈등 등 인생이 뿌리째 흔들리는 순간 다가온다. 그들은 처음부터 공격적인 교리를 들이밀지 않는다. 대신 정중하고 따뜻한 위로의 언어를 건넨다. “성경으로만 확인해 보세요”, “진리가 있다면 누구나 알아야 하잖아요”, “당신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분 같아요.”

이 문장들은 논리적 설득이 아니라 정서적 포섭이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며,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누군가 내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매일같이 연락하며 칭찬을 쏟아낼 때, 인간은 진실 여부를 따지기 전에 ‘안전함’을 느낀다. 이때부터 교리는 진리를 찾는 수단이 아니라, 내가 느낀 이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화 도구’로 전락한다. 관계의 온기에 붙잡히는 순간, 이성은 이미 무장해제된다.

세뇌의 완성: 비판적 사고의 자발적 포기

그들의 시스템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통제’다. 그리고 그 통제는 매우 영리하게도 ‘겸손’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 “너희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라.”

이 단순한 문장은 신도들의 내면에서 비판적 사고를 차단하는 강력한 검열관 역할을 한다. 이 가르침이 반복될수록 신도는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죄’로 인식하게 된다. 의심은 사탄의 유혹이 되고, 타당한 질문은 불순종이 된다. 결국 신도는 “내가 느끼는 모든 불편함과 의문은 나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자책하며 자기 내면의 경고음을 스스로 꺼버린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내면 검열과 자기 조건화의 결합이다. 시간이 지나면 신도는 교회 밖의 정보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심한 불안을 느낀다. 비판적인 기사를 읽으면 죄책감이 올라오고, 외부의 질문을 받으면 심장이 뛴다.

그들은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공포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는 상태가 된다. 공포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접착제다. 이 접착제는 신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신도의 영혼을 조직에 단단히 결속시킨다.

인지부조화와 가족 관계의 파괴

이 집단은 여러 차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해 왔으나, 당연하게도 예언은 빗나갔다. 상식적으로는 집단이 해체되어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예언이 틀릴수록 신도들은 더 강하게 결속된다. 이것이 바로 ‘인지부조화’의 덫이다. 자신이 쏟아부은 시간과 재산, 인생을 부정할 수 없기에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 하나님이 기간을 연장하셨다”는 식의 억지 해석을 더 고결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욱 참혹한 것은 가족 관계의 파괴다. 그들은 “이 땅의 가족은 가짜이며, 하늘의 가족만이 진짜”라고 가르친다. 신앙을 반대하는 남편은 마귀가 되고, 부모는 구원의 방해자가 된다. 가정이 무너질수록 신도는 더욱 교회에 매달리게 된다. 돌아갈 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회를 떠나면 자유”가 아니라 “교회를 떠나면 철저한 고립”이 기다리고 있다는 공포는 신도를 평생의 노예로 만든다.

한국교회가 되새겨야 할 질문: ‘정죄’인가 ‘구출’인가

우리는 그들을 향해 너무나 쉽게 “이단에 빠진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해 왔다. 그러나 경계와 비판만으로는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을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차갑게 외면할수록 사이비의 속삭임은 현실이 된다. “보라, 교회도 세상도 너를 미워한다. 우리만 너를 사랑한다.”

이 문제는 단순한 교리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리를 반박하는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곧 사람을 구출하는 힘은 아니다. 탈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의 유무가 아니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마주할 ‘수치심’과 ‘상실감’이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을 향해 “왜 길을 잃었느냐”고 꾸짖지 않으셨다. 그저 찾아가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다.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모습도 이와 같다. “왜 거길 갔어?”가 아니라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환대의 언어가 필요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이 아니라 “얼마나 힘들었니”라는 공감이 필요하다.

실천적 대안: 안전한 귀환로를 확보하라

이제 한국교회는 이들을 위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귀환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한다.

첫째, 정서적 지지망의 구축이다. 탈퇴자가 겪는 극심한 혼란과 우울증을 케어할 전문적인 심리 상담과 연계되어야 한다. 둘째, 사회적 자립의 지원이다. 이단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빈손으로 나온 이들에게는 당장의 식사와 거처, 일자리가 신학적 답변보다 더 절실한 복음이 된다. 셋째, 가족 공동체의 회복이다. 무너진 가정을 다시 세우기 위해 가족 상담과 중재 역할을 교회가 맡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차가운 판결문을 내미는 대신 따뜻한 식탁을 마련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을 칭칭 감고 있는 세뇌의 사슬은 녹아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맺음말: 우리가 침묵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누군가는 “나만 아니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이비는 언제나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이웃, 친구, 가족의 모습으로 우리 곁을 파고든다.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 누군가의 인생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는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았다. 거대한 시스템에 갇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 그들을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기 위해 썼다. 하나님의교회 안에는 지금도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갈 용기가 없어 밤마다 눈물짓는 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이 언젠가 용기를 내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 때, 교회의 문턱은 그 어느 때보다 낮아야 한다. 그들이 두드리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가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들은 그 지독한 ‘심리적 감옥’에서 걸어 나와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이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이제 이곳에서 편히 쉬어라.”


이 한마디가 우리가 잃어버린 양들을 향해 건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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