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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按手)의 성경적 신학적 고찰
이승구 교수
2019년 04월 19일 10시 56분 입력

우리는 교회와 신앙생활과 관련된 일 가운데 상당수를 어깨너머로 배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전통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다. 그 전통이 좋은 전통인 경우에는 전통 가운데서 배우는 것이 상당히 견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그 전통이 잘못된 경우에는 그냥 전통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잘못된 전통을 계속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전통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성경적, 신학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이승구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그것이 옳은 경우에는 계속해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해왔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성경 가운데서 하라고 했기에 말이다. 그러나 성경적 신학적으로 검토해서 틀린 것들은 가차 없이 시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이고,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 개혁시기는 이런 일을 매우 심각하게 감행했던 귀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그 정신(ethos)을 공유하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실천을 점검해 가야 한다.

안수(按手)도 우리가 역사 가운데서 그리고 교회 생활에서 자주 경험한 전통적 행위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도 이를 보아 왔고, 우리의 교회 생활 가운데서도 자주 이를 경험해 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를 행하고,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이를 검토하려고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다. 과연 성경에서 안수를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성경에 나타난 안수의 두 가지 의미

성경에 보면 대개 두 경우에 안수(按手)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어떤 이를 세워 봉사하게 할 때 종교적 지도자가 안수한 일이 있다. 예를 들어서, 성막에 대한 봉사를 위해서 레위인들을 세울 때 “레위인을 회막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모으고,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민8:9-11)고 하여 안수하는 목적이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모세가 다음 세대를 준비할 때에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라”(민27:18)고 하셨고, “명령하신 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민27:22-23). 그 결과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34:9)라고 하였다.

신약시대에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구제를 위해 일곱 사람을 세울 때에 사도들이 정해준 기준에 따라서 교우들이 선출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6:6)라고 하여, 직임으로 세울 때에 안수한 예가 나온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라고 하여 이미 교회의 교사로 활동하던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 사역에 세울때에 안수한 기록이 있다. 또한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딤전4:14)라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디모데가 목사와 복음 전하는 자로 세워진 것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아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어떤 일을 맡아서 행할 때에 주께서 그 일을 그에게 맡기심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안수한 일들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시대에도 모든 임직의 경우에 다 안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세를 세울 때 안수했다는 기록도 없고, 신약의 경우에도 모든 임직자들에게 안수했다는 언급도 없다. 성경에 나타난 안수의 또 한 경우는 병 고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갈릴리 어느 회당에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어서, 예수님께서 보시고 불러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고 하였다(눅13:10-13). 이 경우에 주님은 치유를 선언하시고 안수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나사렛에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고 한다(막6:5). 벳새다에서는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2-25)하여 두 번 안수하여 고치신 기록도 나온다.

바울도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던 보블리오의 부친의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하였다(행28:8). 이 두 경우가 합하여진 경우로 보이는 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햇빛보다 더 빛난 빛 앞에서 눈이 안 보이고 엎드려져서 사람들에게 이끌려 그 성에 들어간 바울에게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9:17)라고 할 수 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바울이 다시 보게 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얻었다. 사도들이 안수하면 이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모이던 초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셨다(행8:17). 에베소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고 증언하자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했다고 하였다(행19:4-6). 또한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요청에 응하여 어린 아이들을 품어 안으시고 안수하여 주신 일도 있다(마19:15;막10:16).

역사 속에서

이렇게 성경의 예들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처럼, 사도들처럼 기도하면서 안수하는 일을 행하여 갔다. 그런데 다들 생각하지 않은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또 사도들이 임직 때나 병 고칠 때 항상 안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열 두 제자를 세우실 때도 예수님께서 안수하셨다는 말은 없다. 또 예수님께서 병 고치실 때 항상 안수하신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그저 말로만 “죄 사함을 받았다, 나았다” 등의 선언을 하셨고,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경우도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모든 아이를 안으시고 안수하고 축복하신 것도 아니다. 사도들도 병 고칠 때도 항상 안수한 것도 아니다. 둘째는 예수님과 시도들은 그 치유가 온전한 것이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과연 교회에 임직 때와 치유 때에 항상 안수하도록 하셨다는 함의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때가 종교개혁 때였다. 천주교회가 지속적으로 안수하여 소위 사도적 계승을 통해 그 임직자들을 세우면서 사도들에게 있던 그 동일한 권세가 그 후임자들에게 있다고 하며, 따라서 전임자가 안수할 때 사도가 안수할 때에 성령님께서 임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성하며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종교개혁의 교회였다.

성경에 비추어 고찰한 결과 각 교회 공동체에서 사제(司祭), 즉 제사장(priest)이라고 불린 분들이 사실은 제사장이 아니고, 믿는 우리들이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벧전2:9)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교가 안수를 할 때 성령님이 특별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 생겼을 때, 모든 미시적인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개혁파 교회들은 더 철저히 임직식에서 안수하는 것을 없애고 그저 기도만으로 목사직, 장로직, 집사직으로 사람들을 세웠다.

그래서 안수식이라는 말보다는 임직식이라는 말이 더 옳은 말로 자리 잡혔다.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 교회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제1 치리서>(1560년)에서 이처럼 안수를 없애고, 기도만으로 임직식을 하였다. 이 모든 일을 어느 정도 시행하여 미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제2 치리서>(1578년)부터는 장로교회에서 이전에 했던 안수를 부활하되 그것이 단지 상징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들이 그들의 사역을 다하고 하늘에 있는 이 교회 시대에는 안수가 상징적이요, 이것에 의해서 성령님이 임하거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명백히 밝힌 것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직분에로 구별되었는데 주께서 더한 은혜를 주셔서 그 직분을 잘 감당하여 주의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요, 단지 상징적으로 안수하는 것일 뿐이다. 같은 원리가 병 고침을 위한 안수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병 고침에서 때때로 안수하신 일이 있었다. 즉, 예수님과 사도들도 병 고칠 때에 언제나 안수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기도한다고 항상 병이 나은 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디모데의 위장병을 위한 권면에도 그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할 때에 주께서 원하시면 나을 것이요, 주께서 원치 않으시면 병이 지속될 것이며 때로는 죽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간절히 주님께서 우리들의 병을 돌아보시고,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우리를 온전히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여야 하고 주께서는 주께서 원하시는 경우에 고쳐주신다(약5:16).

과연 우리들이 안수를 하면서 기도해야 하는가?

그러면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때 과연 안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예수님과 사도들도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할 때에 항상 안수한것은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자. 그리고 하나님과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면서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에 주께서 병든 자들을 낫게 해 주시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주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점에도 주의하자. 그렇게 모여서 기도하는 중에 누군가가 손을 얹고 기도했는데 주께서 치유해 주시면 얼마 후에 여러 오해가 여러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혹시 그렇게 안수한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그것은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항상 안수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들은 예수님도 아니고 사도들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치 우리가 사도들의 계승자인 양 그들이 안수했으니 우리도 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 때에 우리는 순교하면서도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사도적 직분의 계승은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했었다. 오직 사도적 가르침의 계승이 있을 뿐이며, 그 사도적 가르침에 의하면 처음 신약 교회를 세우실 때 창설직원들로 세우신 사도들만이 아주 독특한 위치를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 교회시대의 교회 직분자들이 자신들이 마치 사도의 계승자인 것처럼 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수하여 직분자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임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되고, 우리가 안수하여 병을 고치는 것처럼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할 뿐이고, 주께서 병을 고쳐 주시도록 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오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첫째, 우리에게 본디 어떤 능력이 있어서 안수하면 병 고침이 발생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께서 모든 것을 살피시어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이 고쳐지는 것이지, 우리의 어떤 능력과 재능에 의해서 병 고침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 둘째, 보는 사람들이 우리가 무슨 힘이 있는 듯이 느끼도록 하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 간구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주님만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모든 것이시다. 그것이 드러나야 한다.

혹시 간절함의 표현으로 환부나 어깨나 머리에 손을 얹고 싶은 마음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시대의 복잡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요즈음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 남자 목사님들이 여자 성도들에 안수하는 것은 불필요한 여러 오해를 낳을 수 있기에 더욱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찰(按擦)이라는 행위가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참된 교회에서는 안찰을 하지 않았다.

기도원 등에서 이런 행위 등이 유행했고 교회들에 영향을 미친 일이 있다. 그러나 바른 교회는 그리하지 않아야 한다. 안찰 행위는 우리 시대에는 그로 말미암아 맞아 죽은 사례도 많고, 특히 오늘날과 같이 신체에 손대는 것을 상당히 금기시하는 시대에는 더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으므로 기독교권에서 근절되어야 한다.

결론: 기도에 더욱 힘써야

이 모든 것을 살핀 우리들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도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수와 안찰을 하지 말라는 것이 간절히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히려 안수와 안찰을 하지 않는 우리들이 더욱 더 힘써 기도해야 한다. 특히 교회 공동체 안의 연약한 자들과 병든 분들을 위해서 주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 온전함을 주셔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에 지장이 있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 결과 주께서 몸을 회복하여 주시면 우리는 우리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만을 높이고 경배하며, 그 주님을 위해 더 자신을 헌신해 가야 한다. 이 일에 그 어떤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우리 자신에게 그 어떤 영광도 돌아오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도록 안수 · 안찰 등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를 따르는 것이며, 종교개혁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