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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승공, 멸공을 이용한 이단들
현대종교 | 장인희 기자 sunnet1004@naver.com
2020년 04월 17일 08시 41분 입력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전쟁을 빌미로 핵무장을 시도했으며 위협을 가했다. 또한 베트남의 공산화와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등이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점점 공산화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을 의식하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공 정서가 전면에 등장했다.

1970년대는 공산화 확산에 대한 불안감으로 나라의 분위기는 혼란스러웠다. 이로 인해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였던 우리나라는 70년대에 들어와 반공사상이 극대화됐다. 이단은 이런 국가적 시류를 놓치지 않고 반공, 승공, 멸공을 이용해 교세를 확장하는 등 사회적 기반의 축을 뒤흔들어 놓았다.

김일성과 손잡은 통일교 문선명

통일교의 정치개입 역사는 1960년으로 올라간다.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수의 통일교 신도들이 베트남 전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했다.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친필로 된 감사편지를 받게 되었고, 미국중앙정보부(CIA)의 지원을 통해 통일교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통일교는 1970년 승공운동을 펼치며 박정희 정권에서 급성장했다. 통일교는 “평화통일”을 하려면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며 승공사상을 앞세웠다.

 

▲⓵1991년 단독회담을 진행한 통일교 (좌측부터 문선명, 김일성, 한학자) ⓶통일교 문선명과 김일성 (출처: 「세계일보」)

  

문선명은 1975년 6월 7일 구국세계대회를 통해 “우리가 어려운 역경을 극복하여 공산주의를 철두철미하게 이겨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승공통일의 세계 구축에 있어서 한국이 주도권을 잡는다는 말(이다)”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사상과 이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주장이다. 종교통일의 원리는 승공이념이며, 통일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승공이념은 공산주의를 분석 ·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승공에 대해 설명했다. 「세계일보」 전 사장 박보희는 『21세기 한국의 비전과 남북통일』에서 “남북통일은 문선명 선생의 숙원이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선명 선생의 “승공사상”이라며 “승공이념은 세계를 공산주의 마수에서 구할 수 있는 사상이며, 이는 20세기의 새 종교혁명이다”라고 승공사상에 관해 설명했다.

통일교는 승공활동을 통해 기반을 닦았으며, 1968년 국제승공연합[편집자주: 1968년 전 국민을 철저한 승공사상으로 무장시킬 목적으로 만든 사회단체]이란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으나, 지금은 활동이 미비하다. 하지만 1987년 문선명은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만들었다. 문씨는 기조연설을 통해 “우리 조국의 민주화는 역사의 명제이며, 국민양심의 지상명령이다”라고 말했다.

승공이념을 외쳤던 문씨는 민주화라는 명제를 통일에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탁지일 교수(본지 이사장 겸 편집장)의 『사료 한국의 신흥종교』에 따르면 “통일교는 1970년대 한국 유신정권에 대한 지원과 적극적인 멸공운동을 통해 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며 “1987년에는 통일교가 다수의 국회의원 출마자를 금품으로 매수해 통일교에 대한 정치권 지지세력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정치인들이 친필로 서약서를 작성할 경우 문선명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한다”고 전했다.하지만 승공사상을 내세웠던 문선명은 친공사상으로 태세 전환한다. 그 실제적인 예가 1991년 12월 6일 진행된 북한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이다.

공산주의자인 김일성과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반공주의자인 문선명의 만남은 이례적인 행보와 동시에 사회적인 이슈였다. 문선명은 ‘하나님주의’를 내세우며 김일성을 회유했다. 문선명은 이 회담을 통해 남포 평화자동차 공장, 평양 보통강호텔, 평화센터를 건립하는 등 대북사업을 추진하며 통일교의 입지를 굳혔다. 반공과 승공 그리고 친공까지 이용한 통일교 문선명은 북한 김일성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며 대북 사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통일교의 세를 키우는데 일조했다.

현재까지도 북한과 통일교의 관계는 우호적이다. 얼마 전 열렸던 문선명 탄생 100주년 행사에 북측은 축하 화환과 축하 편지 등을 전달한 바 있다. 한편 통일교는 2003년과 2008년에 천주통일가정당과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했으나, 득표수 부족으로 정당등록이 취소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손잡은 영세교 최태민

▲박근혜 전 대통령 (출처: 대통령 기록관)

반공사상을 주장하며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 인물로는 최태민이 있다. 최태민은 한국교회의 사회적인 신뢰도가 높았던 70년대 초반 영세교라는 신흥종교를 앞세워 등장한다. 서울시와 경기도 일대, 충청도 등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인 최태민은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합친 교리를 내세웠다.

 

또한 최면술을 통해 영혼합일(靈魂合一)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본지 탁지일 교수는 <최순실은 최태민의 종교적 후계자인가>란 제하의 기고를 통해 “최태민은 신흥종교단체의 교주였다. 스스로를 조물주로 부터 보내심을 받아, 불교의 깨우침, 기독교의 성령강림, 천도교의 인내천을 이룰 칙사님이라는 것(이다)”라며 “혼합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자신의 영험함을 주장했던 전형적인 비주류 신흥종교의 교주”라고 말했다.

공산화 확산에 따른 불안감이 최고조였던 1975년 교계는 구국기도회를 통해 국가의 안녕을 꾀했다. 이에 최태민도 같은 해에 구국선교단과 구국십자군을 만들어 활동했다. 최태민은 이 단체들을 통해 기독교계 반공인사들을 모았고, 반공을 앞세워 한국교회에 접근했다.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대한민국은 왜』를 통해 “한국 기독교에서 극우 반공주의가 거의 신앙처럼 자리 잡자, 교회에 나가거나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은 반공주의의 증표, 즉 신원을 보증해주는 신분증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최태민 (출처: 「중앙일보」)

  

한국사회를 둘러싼 반공주의가 기독교계의 반공신앙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과 같다. 최씨는 이를 이용해 같은 해 박근혜에게 “죽은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와 박근혜를 구하라고 했다”는 편지를 보내는 등 박근혜의 환심을 샀고, 그 뒤로부터 박근혜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2016년 11월 9일 TV 조선이 단독으로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최태민은 박근혜에게 “아시아의 지도자”, “여성 대통령”이라는 단어를 주입시키며 외부활동을 권했다고 한다. 박근혜가 1998년 정치를 시작한 것도 최태민의 영향이 컸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영세교 교주였던 최태민은 구국선교를 명분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다가갔고, 핵심 권력층으로 급성장했다.

이후 박근혜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청문회 등을 통해 최태민에 대한 모함은 억울하다며, 최태민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질문에는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엔 최태민은 1970년대라는 시대적인 상황과 반공이라는 이념 그리고 사이비 종교를 접목시켜 정치적인 커넥션을 형성하게 됐다.

국가적인 불안감 해소와 안정화를 위한 반공, 승공과 같은 정치 이념은 이단 · 사이비에겐 선택적 이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치 권력과의 ‘연합’이라는 미명하에 ‘공생’하며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다가가는 이단 · 사이비의 모략적 행태를 의식하고 의심하는 경계 태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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