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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는가?
존 레테콥
2020년 11월 20일 08시 55분 입력

여러 나라에서 기독 시민이 소위 기독교 정당을 조직해 왔다. 대체로 기독교적이란 단어가 캐나다의 기독교 유산당처럼 정당 이름에 나타난다. 이런 정당은 일반적으로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 정당이 이름은 유지하되, 고유한 기독교적 가르침을 포기했던 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 기독교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존 레테콥
트리니티웨스턴대학교 교수 역임

    

많은 관찰자는 기독교인이 기독교 진리를 실행하는 방법의 하나로 선거의 승리를 위해 정당을 조직해선 안 된다고 믿는다. 그 이유로 첫째, 그런 전략은 분열적이다. 기독 시민은 어떤 가치를 정부가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해 다양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은 복음의 어떤 부분이 강조되는가에 따라, 자유주의적이거나 보수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견해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교회와 정당은 각각 다른 사명, 목적, 범위, 방법, 윤리적 규범 그리고 목표를 지닌다. 다음의 비교표는 광범위한 대조를 보여준다.

   

  

정당이 많은 기독교적 가치를 포용하는 것은 가능하며 정말 바람직하다. 많은 기독교적 가치는 공공정책으로 바람직하다. 단지 그것들이 기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반적인 공리주의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정당의 기독교 회원들은 이것을 이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기독교적 영향력은 널리 확산하였다. 많은 정책에 상당한 계몽과 미덕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 영역에서 정당으로 역할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근본적 목적 즉 예수가 자신의 교회를 세운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상상할 수 있듯 일군의 기독교인들이 전적으로 기독교 정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자신의 가치에 충실하다면, 그 정당은 타락하고 비기독교적인 사회에서 유용한 비판세력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교회가 정당으로 기능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문제다. 비록 정권 일부가 아니라 야당으로 활동한다 해도 말이다. 기독교 윤리는 자신의 유익보다 타인의 복지를 우선시한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기려고 선거운동을 벌이는 정당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회는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지만, 국가는 그렇게 한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진정한 기독교 정당이 선거에 이겨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면, 더는 기독교 윤리에 충실할 수 없을 것이며, 결국에는 엄격하게 성서적인 목적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기독교인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유권자를 위한 또 하나의 선택으로 철저하게 성서적인 정당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최소한 ‘이상의 상징’(a symbol of the ideal)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특정 정당이나 이념과 혼동해선 안 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더 고귀한 질서에 속한다. 또한 우리는 성서를 잘못 적용해도 안 된다. 적지 않은 수의 기독교인이 전도서 10장 2절을 때로는 장난으로, 때로는 심각하게 자신의 우파적 신념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해 왔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나는 그토록 뛰어난 솔로몬이 현대의 좌,우 정치적 스펙트럼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적었다고는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정치적 선택에 직면할 때 모든 상황에서 무엇이 최고의 선택인지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우리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정도까지 그것을 지지해야 한다. 정당, 선거, 정책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선택할만한 장점이나 매력이 없다면 덜 악한 것을 지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 글은 존 레테콥의 『기독교 정치학』 내용 중에 ‘10장 기독교 정당이 존재할 수 있는가?’(pp.181~196) 부분을 도서출판 「대장간」의 허락을 받아 발췌 및 요약하여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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