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 작게보기
페이스북
[현요한 교수] 회개가 궁금하다
현대종교 | 현요한 교수 rlawjdtn@hanmail.net
2021년 01월 26일 08시 48분 입력

‘회개’란 죄악을 범한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슬퍼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요구하신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 없이는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참된 구원에도 이를 수 없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 회개가 구원을 이루게 하는가? 믿음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믿음과 회개는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를 보여주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죄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회개함이 없다면 그것이 올바른 믿음일까?

‘회개(悔改)’라는 말의 한자의 의미는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라는 글자를 사용하여 무언가 잘못된 일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나타낸다. 영어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흔히 repent(명사, repentance)라는 말을 사용하여 다시 참회함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회개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나함’이라는 말과 ‘슈브’라는 말이다. ‘나함’은 그 동사 변화 형태에 따라 슬퍼하다, 위로하다, 한탄하다 등을 의미하였는데, 대체로 잘못된 일에 대한 슬픔과 애통의 감정적인 상태를 나타내었다. ‘슈브’는 잘못된 일을 행하다가 마음을 변화시켜서 올바른 길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나타내었다.

‘슈브’가 사람이 죄악된 행위에서 자신의 마음과 삶을 돌이켜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함’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슬픔의 감정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는 ‘메타노에오’ 혹은 ‘메타노이아’라는 말로 죄에 대한 감정적 반응과 돌이키는 마음을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만 메타노에오와 에피스트레포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회개는 단지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라, 의롭고 선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이키는 것이요 방향 전환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마음뿐만이 아니라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의미하는 세례를 받기 위해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였다(마3:8). 그런데 회개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한 번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 이후에도 죄를 지으면 계속해서 해야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위해서 속죄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한 번 회개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그 이후에는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한 번으로 모든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한 속죄를 이루신 것이 맞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의하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는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해마다 다른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처럼 반복해서 자기를 드리려고 하시지 않고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히9:26)”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한 번으로 영원한 속죄이며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영원하고 완전한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주님의 속죄의 은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은혜이지만, 실제로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은 회개와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행2:38).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던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생에 한 번 그러한 회심을 경험한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들의 믿음과 회개가 언제나 완전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신자의 믿음은 완전하지 않고 수시로 흔들린다. 물론 우리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롬8:15-16). 우리가 참되게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요5:24).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자녀답게 완전한 삶을 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때때로 우리가 실수하고 다시 범죄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9절에서 그러한 형편에 처한 사람의 갈등과 가책의 경험을 분명하게 증언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까?

그리스도의 속죄가 한 번으로 영원하니 이제 나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범죄를 회개하지 않고 (심지어 그 죄를 정당화하며) 그 속에 그냥 걸어가야 할까? 하나님이 그런 삶을 기뻐하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태도는 뻔뻔하고 교만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지은 죄가 있다면 마땅히 그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의 은혜가 계속 적용되는 것이다. 요한1서 1장 8-10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당연히 우리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고 한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이다.

복음의 은혜는 상식을 초월하지만 그것은 상식보다 고상한 것이지 상식보다 저급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어렵게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은혜스럽게 하자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런데 그럴 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은혜스럽게”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옳고 그름도 무시하고, 잘못된 일을 회개하고 고치지 않고 덮고 넘어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은 은혜스러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일, 죄악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치며 주님의 용서의 은혜가 흘러 넘치도록 함이 은혜스러운 일이다. 복음은 싸구려가 아니다. 복음의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뿌려대는 싸구려 물건은 아니다. 복음의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희생을 댓가로 치른 매우 값비싼 은혜이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당시 독일 교회가 값싼 은혜에 빠져 있다고 질타한 바 있는데, 한국교회도 그런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란 영적 진실보다도 어떤 원리에 의지하여 주어진다고 믿는 은혜, 죄인이 아니라 죄를 정당화하는 은혜, 회개 없는 죄용서, 죄고백 없는 성만찬, 제자로서 주님을 따름이 없는 은혜, 십자가도 예수도 없는 은혜를 가리킨다.

회개는 그리스도인들이 처음 회개하여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한 번의 회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과정에서 필요할 때마다 계속해야 하는 회개를 모두 포함한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회개를 표현하는 헬라어 동사의 형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헬라어 문법에서는 동사의 과거나 현재와 같은 시제는 그 동작이 일어나는 시간이 아니라, 일어나는 동작의 양태를 의미한다. (물론 그 직설법적인 표현에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의미할 수 있다.) 즉, 단순과거(아오리스트) 시제는 동작의 단순한 발생을 나타내는 것이고, 현재 시제는 동작이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 38절1)이나 사도행전 3장 19절2) 같은 경우에는 단순과거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이 본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회심하는 하나의 회개를 단순히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 3장 2절이나 마가복음 1장 15절은 현재 시제로 표현되어 있다. 이 본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계속해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회심을 의미하는 회개는 한 번이지만, 삶의 회개는 계속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에도 죄용서를 위한 기도가 들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이 기도는 한 번 하고 그 만두는 기도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이 계속해야 하는 기도이다.

 

_________________

각주

1) 행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2)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저작권자 (C) 월간 현대종교(hdjongkyo.co.kr), 영리 목적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현요한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