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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미래”에 집착한 선교의 종말
현대종교 | 차정식 교수
2022년 10월 26일 08시 40분 입력

나도 하긴 다가올 미래가 궁금하긴 하다. 미래학이란 학문 범주가 생겨난 지 꽤 됐고, 적잖은 석학들이 다가올 미래에 대해 각종 묵시록적 예언을 양산한다. 가장 굵직한 관심사는 북극 빙하의 급속한 붕괴와 해수면의 상승, 툰드라 지역의 온난화로 인한 이산화탄소 급팽창, 나아가 이로 인해 벌어질 지구촌 육지 거주자들의 파국적 종말에 대한 예감이다.

가끔 내가 가지고 있는 고도계로 내 주거지의 고도가 앞으로 15년 후 상승할 해수면 높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 계산하다가 피식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다들 파멸적 상황에 직면한다면 누가 조금 더 버티냐의 생존 게임일 텐데 조금 더 살든, 조금 덜 살든 그게 무에 그리 대수인가 싶은 것이다.

다만 이렇게 숱한 경고음을 냈는데도 코앞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해 ‘나 몰라라’ 하면서 살아온 이른바 과학기술문명 세대에 대한 탄식도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반응이다. 그런가 하면 이즈음 가속화하는 미중 G2 국가의 대립과 대만 변수로 인한 갈등,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서방 나토 세력의 동진 정책에 대한 응전 등 3차세계대전이나 이에 준하는 파멸적 충돌이 예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국제정치적 위급 현안이란 맥락에서 군사대국이 보유한 핵무기가 폭발할 때 이 지구촌이 콩가루처럼 무너지리란 끔찍한 종말론적 시나리오도 오래전부터 항간에 회자되어 왔다.

그러나 1992년 10월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 지구상에 종말이 도래하리라는 20년 전 한국 기독교 일각의 난리법석 사태는 상기한 종말론적 파국의 합리적 추론과 결이 다른 특이한, 그러나 기독교 생성기 이래 2000년간 집요하게 계속되어온 묵시주의적 종말신앙의 한 변종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압축한 ‘다미’라는 이름의 선교단체가 특정한 날짜를 확정해 예수 재림과 종말 실현을 예언하였고 이는 세기말적인 분위기에 편승해 특이한 집단 최면술을 발휘하면서 기독교 내부는 물론 그 바깥 사회까지 요동치게 만들었다. 목사들을 포함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캠페인에 감염되었고, 그들의 환상과 각종 예언 담론은 혹세무민의 의혹을 뭉개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흔들었다.

▲92년 10월 28일 휴거를 주장했던 다미선교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이른바 소년 예언자 하방익의 용한 예언을 주변의 어른들이 부추긴 일이다. 또 그것을 몇몇 시한부 종말 전도사들이 하나님이 계시한 확고부동한 징조인 양 전파하면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불안 증상을 확산했다. 당시 이러한 일각의 세태는 그야말로 후천개벽의 신천지가 금세 도래할 듯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 당시 시카고대학교 신학부 유학생으로 저명한 묵시문헌 전공학자인 존 콜린스(J. J. Collins) 교수의 쿰란 세미나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시카고 교민사회에 휘몰아치던 10월 시한부 종말신앙 파동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 그때 주요 일간지 기자 출신의 목사가 시카고 모 교회 담임으로 목회하면서 이 시한부 종말신앙에 감염되어 정해진 10월 28일 휴거를 받아야 한다며 모든 교인들에게 흰 세마포를 지어 입게 하고 예배당에 모여 열광적인 집회를 열었다.

이것을 희한하게 생각한 미국의 주요 방송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 장면을 찍어 뉴스거리로 삼아 대대적인 보도를 할 즈음이었다. 10명이 채 안 되던 그 세미나 수업 시간에 콜린스 교수는 유일한 한국인 학생이었던 나를 자꾸 쳐다보면서 강의를 이어갔다. 2000년 전 쿰란공동체의 묵시적인 종말신앙이 특정 시간대에 실현되지 않게 되자 그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민 대안은 하늘의 시간표가 변경되었다는 것일 텐데, 오늘날 시한부 종말신앙에 휘말린 한국교회 공동체도 그 설정 시점이 지나면 똑같은 변명을 하면서 오리발을 내밀게 되리라고 그는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

나는 이 순간이 창피했고 한국교회 일각의 반지성주의 풍토가 괜스레 떫었다. 시카고의 그 담임목사는 고등교육까지 받은 기자 출신이면서 시한부 종말신앙의 문제점을 간파할 만한 정도의 신학적 성찰 능력도 없었는지 내심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내가 더 개탄한 것은 시카고 교포사회의 알 만한 일부 다른 기성교회 목사들도 이러한 강렬한 종말신앙의 회오리 광풍에 비판적 통찰을 하지 못한 채 혹여 예수 재림이 그날에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양다리 걸치기식의 대응을 보였던 씁쓸한 기억도 남아 있다.

예수님이 사도행전에서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시한부 종말신앙의 광풍은 더 기승을 부렸을 것이다. 이 구절의 말씀 또한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실현이란 맥락보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는 시점을 묻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사도행전의 당대 맥락에서든, 일반적인 성서신학적인 맥락에서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한다는 표현은 여러 겹의 중층적 함의를 띠고 있다. 이처럼 그 일차적인 맥락을 제거한 상태에서 간편하게 적용해서 종말론적 도그마를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인지 2000년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다미선교회와 같은 시한부 종말신앙 광풍은 반복되고 앞으로도 유사하게 반복될 소지가 크다.

시작이 있었으니 종말도 응당 도래할 것이다. 우주의 시작, 지구별의 시작, 인간이란 존재의 시작 등 다 마찬가지다. 개인 생명의 종말을 우리가 경험하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언젠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또 소멸하게 되리라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으로 정당하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여기에 예수님의 재림을 매개항으로 끼워 넣어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한순간 파국을 겪고 온 세상이 송두리째 망하게 되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석고대죄하리란 상상을 한다. 천동설을 믿던 때 지구가 평평한 땅이란 세계관을 신봉하면서 만들어진 이 신화적 종말의 패턴을 고지식하게 문자적으로 신봉하는 믿음이 그 상상의 발판이다.

이러한 믿음의 자장에 가장 쉽게, 빨리 달라붙어 자신의 ‘운명’을 거는 부류는 대체로 사회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무기력하며, 사는 게 고통과 설움인 외로운 인생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괴로운 생을 속절없이 이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어서 빨리 죽어 천당으로 직행하는 게 나을 텐데, 저 홀로 죽어 사라지기엔 미련도 많고 억울한 듯싶어 이 지구촌 생명체가 모두 한꺼번에 공멸하듯 종말을 고하는 편이 좋겠다는 갈망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 갈망은 마침내 파괴적인 신념으로 똘똘 뭉쳐 시한부 종말신앙을 제조하는 태반을 제공한다. 그것은 나의 불행이 극단적으로 투사된 ‘물귀신작전’의 심리적 변용으로 볼 만한 병리적인 구석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서적으로 건전한 종말 신앙의 대안인가. 먼저 종말에 목매달고자 하는 욕망의 존재인 인간의 사회심리적 내면을 깊이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그 연약한 인간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에 눈떠서 두루 품고 연민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양성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견지할 때 개인 삶의 종말이든, 우주 세상의 종말이든, 이 모든 것이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 너머 절대자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인식을 갖고 매사 열심히 살되 선한 일에 힘쓰며, 특히 죽어가는 생명을 극진하게 사랑하는 일, 그 사랑의 힘으로 죽어서도 다시 살리라는 부활의 희망을 신앙적으로 견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대로 이 세상살이가 너무 풍족해 이 땅에서 넉넉한 복을 받아 희희낙락하며 이 세상의 쾌락에 붙들려 탐욕으로 부풀어가는 자신이나 특정 군상을 향해서는 그것이 한순간 잿더미로 돌변해 소멸할 수 있으리라는 종말론적 긴장의 끈을 회복하는 신앙적 각성이 긴요하다.

하여 우리가 죽으나 사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선교를 이어가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과 삶으로 선포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게 더 건실한 신앙생활의 방향이다. 치명적인 질병이나 사고로 사망선고를 받은 뒤 기적적으로 소생한 사람의 고백을 참조하면 건실한 종말신앙의 좌표도 대강 그려진다.

그들의 공통된 고백을 참고하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신앙은 자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타인을 신앙의 이름으로 협박하기보다 스스로 분발하여 더 성실하게 살게 하고 세월을 아껴 더 열심히 사랑하게 이끌며 더 너그러운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지혜와 관용의 속사람을 키워줄 뿐 아니라 결국 하늘 아버지를 닮아 온전해지는 길을 추구하도록 견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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