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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이단(異端)과 이설(異說) (7)
현대종교 | 이상규 교수
2022년 10월 26일 08시 40분 입력

7. 몬타누스파(Montanist)

150-172년 사이에 소아시아 프르기아(Phrygia)에서 일어난 몬타누스 이단운동은 앞서 언급한 영지주의나 마르키온주의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몬타누스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몬타누스파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기독교운동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교회개혁운동의 성격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한 그릇된 사상에서 출발하여 2세기의 시한부 종말론적 이단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2세기 당시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기대가 식어지고 교회 안에 안일과 나태가 구체화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보혜사(Paraclete) 성령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은 오도된 방향으로 전개되어 결국 거짓계시운동, 곧 위경운동(僞經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은 156년경 소아시아의 프리기아(Phrygia)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의 발상지 이름을 따서 ‘프리기아파’(Phrygians)라고 불리기도 했고, 이 운동의 중심지가 된 ‘페푸자’를 따서 ‘페푸자파’(Pepuzans)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2세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이름은 ‘신예언파’(New prophecy)라는 칭호였다. ‘몬타누스파’ 혹은 ‘몬타니즘’이란 용어는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디디무스(Didymus, 313-398)의 글에 처음 등장한다.

몬타누스파의 창시자인 몬타누스(Montanus)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제롬에 의하면 그는 소아시아의 프리기아(Phrygia) 출신으로써 키빌레(Cybele)라는 여신전에서 종사하던 사제였다고 한다. 키빌레라는 종교는 소아시아의 밀교(密敎)로서 신들의 대모(the great mother of gods)로 알려져 있다.

이교 출신의 초신자였던 몬타누스는 나름대로는 교회개혁의 의지가 있었으나, 172년경부터 자신이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있음을 주장하면서 예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성부의 시대가 끝나고 성자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이제 성자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엑스타시 상태에서 나타나는 ‘영’(靈)을 강조했는데, ‘엑스타시’(Ecstasy)라는 말은 그리스어 ek(∼의 밖으로)와 histanai(놓다, 서다)의 복합어 엑스타시스(ekstasis)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기 밖에 있다’(outside oneself)는 의미였다. 완전히 자기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의 망아(忘我)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서 금식하고 고통을 자초하며 춤을 추고 환상을 보고 예언하곤 했다.

모든 운동이나 사상은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데, 몬타누스 이단이 출현할 당시 교회는 재림의 지연으로 인한 신앙적 해이와 속화현상이 심화될 때였다. 영지주의의 도전으로 교회가 혼란하였고 특히 초대교회를 특정 지어 주던 성령의 역사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특히 교회의 제도화가 이루어져 공교회주의(公敎會主義), 혹은 보편교회적 성격(catholicism)이 심화되었다.

신국의 도래를 대망하던 종말론적 기대가 식어지고 신국은 제도로써 교회 안에 있다는 신념으로 대치되어가자 교회에는 도덕적인 순결성과 거룩한 생활, 엄격한 규율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교회는 안이한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다.

몬타누스운동은 바로 이러한 2세기적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교회의 속화(俗化)와 제도화에 반기를 들고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강조와 주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예언, 그리고 엄격한 금욕을 주장하며 당시 교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몬타누스는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원시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면서 자신이야말로 요한복음에서 약속한(요15:26) 보혜사의 대언자(mouthpiece)라고 주장하였다. 후일에는 그 자신이 바로 보혜사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보혜사 성령을 강조하고, 소위 ‘새로운 예언’을 강조하였는데 금식, 금욕, 환상과 사적(私的) 예언을 강조하고 이를 절대화함으로써 ‘거짓계시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몬타누스는 남편을 버린 두 여인,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스킬라(Priscilla)를 여선지자로 두고 이들을 통해 페푸자(Pepuza)에 새 예루살렘이 임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곧 당시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자기들의 교회를 세우고 자기들의 교회야말로 충분한 복음을 지닌 특수한 교회라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이전 시대보다 더 높은 수준의 도덕과 철저한 금욕을 주장하고, 순교를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이단운동은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황제 치하의 극심한 사회적 빈곤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잔인한 탄압 가운데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하고 있는 기간(161-180) 중 로마제국에는 여러 가지 재화(災禍)가 발생했다.

그가 권좌에 오른 지 6년째인 166년에는 제국 내에 범람하였던 홍수, 이로 말미암은 기근, 그리고 다뉴브국경으로부터의 야만족의 침입 등으로 심각한 가난과 정치적 혼란 중에 있었는데, 이 해를 로마의 사가들은 액년(anus calamitosus)이라고 불렀다. 이런 빈곤, 경제적 파탄, 기근은 현세적 삶에 의미를 주지 못했다.

처참할 정도의 생존의 고통과 수준 이하의 빈곤이 그 시대를 압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박한 종말에 대한 선포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가난한 대중들은 몬타누스주의에서 평안을 기대하였고, 페푸자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현실이 암담하고 참담할수록 신국에 대한 기대는 강력했던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가난하고 핍절된 민중들은 몬타누스주의에 매혹을 느끼고 ‘새 예루살렘’을 찾아 순례자의 길을 갔다. 그 결과 한적한 촌락으로서 개발되지 않았던 사막지대 페푸자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의 희망의 도시로 변모해 갔다. 이런 점에서 몬타누스주의의 ‘새 예루살렘’의 예언은 사회, 경제적인 유토피아니즘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207년에는 당시 교회지도자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이 이단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는 칼 라너 같은 천주교 신학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했다고 가정하는 일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기성교회의 속화에 실망하고 철저한 금욕을 주장하는 이들에 호감을 가지고 관여했는데, 광란적 예언이나 시한부종말론, 여성의 지도력 등은 거부했지만 엄격한 생활, 세상과의 분리, 금욕적 생활, 기꺼이 순교하려는 자세 등에 대해서는 매력을 갖게 되었다.

몬타누스주의는 갈라디아, 시리아, 흑해 연안까지 전파되었으나 저들의 예언이 거짓으로 판명되면서 급속히 그 추종자가 줄어들었다. 179년에 이르러 그 지도적 인물들, 곧 몬타누스, 막시밀라와 프리스킬라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 영향력은 쇠퇴해 갔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고 6세기까지 계속되었고 500-550년 어간에 완전히 사라졌다. 영지주의와 마르키온주의처럼 몬타니즘도 당시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이단운동은 이름을 달리하면서 교회사에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몬타누스주의자들과 같은 시한부종말론은 1989년 우리나라에서도 큰 풍파를 일으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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