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몬타누스 이단운동과 테르툴리아누스
초기 기독교의 이단에 대해 살펴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어떻게 그리고 왜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C. 160-220)가 이 이단운동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이는 마치 ‘익명의 그리스도론(anonymes Christentum)’을 주창했던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같은 천주교 신학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했다고 가정하는 일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단논박』, 『변증』 등과 같은 책을 썼던 인물인데, 그가 몬타니스트 운동에 관여한 것은 201년 혹은 202년경으로 보이는데, 이 무렵 몬타니즘은 이미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북아프리카 칼타고 출신인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생애 대부분을 칼타고에서 보냈는데,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신앙을 변증했을 뿐만 아니라, 정통신학을 수호하는 여러 편의 글을 남겼던 학자였다. 그의 『변증』이나 『영혼의 증거』(On the witness of the Soul) 혹은 『이단들의 취득시효』(Prescription against the Heretics) 등을 보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지성이 엿보인다. 그런 그가 일반교회에 의해 이단이라고 간주되었던 집단에 참여하여 저들을 옹호한 일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비록 후에는 이 집단과 결별하였지만, 어떻게 몬타누스주의에 가담하게 되었을까? 미국의 교회사학자인 곤잘레스는, 이를 교회사에 남겨진 신비한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점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의 분명한 기록이 없음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몇 가지로 가능한 해답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첫째, 곤잘레스는 몬타누스주의와 테르툴리아누스 사상의 성격과 신학상의 유사성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스 폰 캄펜하우젠의 의견도 동일하다. 캄펜하우젠은 테르툴리아누스는 본래부터 환상적이고 황홀경적인 종교현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몬타누스파와 유사한 사상적 편린들을 지적한 바 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몬타누스파의 교회개혁 의지가 테르툴리아누스에게 공감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몬타누스파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주장은 당시 나태한 교회에 새로운 동력을 부여하였는데, 이것은 제도화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교회에 내적 개혁의 의지로 투영되었고, 결국 당시 교회의 약점을 극복하는 개혁운동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정통교리와 생활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당시 교회 신자들의 형식적이고 도덕적 속화현상을 비판했던 점은 그가 몬타누스파의 교회개혁 의지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세상과 구별된 삶의 방식, 그리고 금욕에 대한 강조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는데, 이런 점들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공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독신생활은 결혼생활보다 고상한 것으로 여겼고, 아내에게 만일 자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 과부로 지내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재혼을 간음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런 성향이 몬타누스파에 동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회가 카리스마적인 것보다는 조직과 제도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므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보다 엄격한 훈련과 금욕적인 생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테르툴리아누스 작품 중에서 금욕생활에 관한 글들은 그가 몬타누스주의에 심취했던 기간에 쓰여진 작품들인데 몬타누스파의 청교도적인 엄격성과 윤리(stern puritanism)가 호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F. F. 브루스는 “실제로 테르툴리아누스는 당시의 가톨릭교회와 관계를 끊고, 마침내 자기가 일컬었던 ‘성령의 사람들’(Men of the Spirit)과 완전히 합류하기 수년 전부터 그의 저술들 가운데 몬타누스파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부연하였다.
몬타누스파와 테르툴리아누스 간의 세 번째 유사성은 분리주의적 문화관이었다. 몬타누스파는 통합적이고 일원론적인 세계관 혹은 문화관을 가졌다기보다는 이원론적인 세계관 혹은 이원화(dichotomize)로 심각하게 경도되어 있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성별된 삶을 악한 이 세상과 구별된 영역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세상을 반립(反立) 구조로 보았던 테르툴리아누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곤잘레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몬타누스주의에 가담한 것은 신학과 사상의 유사성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사성이 있다. 당시 교회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따르며 그 뜻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재림의 지연으로 말미암은 신앙적인 해이와 냉랭함, 교회의 세속화 현상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점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필요했는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그 시대의 교회를 성령의 새로운 시대에 의해 대체될 잠정적 단계, 혹은 중간적 단계로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몬타누스주의자들은 기성교회와는 다른 엄격한 금욕과 세상과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중간적 상태와 구별된 성령의 새로운 시대의 특징으로 본 것이다. 모든 일에 질서와 완전한 체계를 추구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견해에 동조한 것이다.
특히 그는 자연계의 유기적 성장에 비유하여 종교를 단계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교회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고 말하는 몬타누스주의에 동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종교를 네 가지 발전적 단계로 보았는데,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생득적(innate) 관념을 갖는 자연종교, 두 번째 단계는 구약의 율법적(legal) 종교,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의 지상 생활 기간의 복음, 네 번째 단계는 보혜사의 계시, 곧 몬타누스파의 영적 종교로 보았는데, 그는 자신의 견해를 따라 중간적, 잠정적 단계보다는 성령의 새로운 시대의 산물인 몬타누스파에 더 큰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이 저명한 교회사학자인 필립 샤프의 주장이다.
물론 당시의 (가톨릭)교회를 성령에 의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중간적 단계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었고, 따라서 성령에 의한 새로운 대망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테르툴리아누스는 그의 생애 말기에 몬타누스파에 실망한 나머지 이 집단으로부터 떠났다. 그러나 잠정적인 기간 그는 몬타누스주의와 당시의 가톨릭교회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는 독자적인 분파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아프리카에 있는 추종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파(Tertullianists)라고 불렸고, 이 집단은 5세기까지 계속되다가 결국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감화와 활동에 의해 교회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테르툴리아누스가 한때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여 저들의 입장을 변호했던 일은 2세기 당시의 상황, 몬타누스파의 성격과 테르툴리아누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시에 테르툴리아누스가 필립 샤프의 말처럼 비록 정통교리를 지키고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몬타누스파에 가담하여 오도된 체계를 변호했던 일은 큰 과오였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몬타누스파에 가담한 기간에도 교리적 오류에 대한 비판과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프락세아스에 대한 반론』(Against Prasxeas)은 이 기간에 기록된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기독론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삼위일체’(Trinitas)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2세기 당시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했던 몬타누스파의 새 예언(neva prophetia) 거짓 계시로 판명되었고, 위대한 신학자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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