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리우스 자신이 과연 어떤 입장을 지녔는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어떤 주장을 하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 (복잡한 역사적 논쟁을 하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주장은 무엇인가?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인정한다. 그것도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인정한다. 그런데 그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이 어떻게 연합하여 있는지에 대해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성경적인 정통파 입장과는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한 위격으로 있고, 인성도 또 하나의 위격으로 있어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두 위격으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성의 위격성을 온전히 주장할 수 있는 바르고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위격이 없는 인성이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위격을 낳았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를 “인간을 낳은 자”, “그리스도를 낳은 자”(Christotokos)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은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온전히 보존되려면, 성육신 이전과 이후에도 신성의 위격이 독자적으로 있고, 또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온전하려면 성육신 이후에 인성의 독자적 위격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통파의 반응1: 칼케돈 정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입장에 동의하면서 나아가고, 또 일부 사람들은 이런 입장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면서 (지난번에 생각한) 성육신 이후에는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져서 신성도 아니고 인성도 아닌 제3의 성을 가진 듯이 주장하는 유티케스주의의 주장을 하여 교회가 매우 복잡해지자 당시 교회 대표자들이 칼케돈에 모여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지혜를 모아 가장 성경적인 입장을 분명히 선언하였다(칼케톤 공의회, 451).
즉,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였으나, 신성과 인성의 각 성질이 “혼합 없이(without conversion=unconfusedly), 변화 없이(without change=unchangeably), 분리됨 없이(without division=indivisibly), 나뉘어짐 없이(without separation=inseparably)” 한 위격 안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한 위격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온전한 신성과 인성이 위격적 연합을 하였는데 이때 신성과 인성의 그 어떤 변화도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신성과 인성) 각각의 성질은 보존되면서 한 위격(One Person and One Hypostasis) 안에 있게 된다. 두 위격으로 나뉘어짐(departed or divided into Two Persons)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같은 아드님, 성부의 독생자, 말씀, 주님, 예수 그리스도(One and the Self-same Son and Only-begotten God, Word, Lord, Jesus Christ)이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칼케돈 정의(Chalcedon definition)라고 한다. 이것이 성경적 정통파의 명확한 입장이다.
이 중 앞의 두 가지 말, 즉 “변화 없이, 혼합 없이”라는 말은 유티케스주의에 대한 반박을 명확히 한 것이다. 유티케스주의자들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할 때 변화와 혼합이 일어났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칼케돈에 모인 교회 대표자들은 이런 변화와 혼합이 없다고 하면서, 이를 인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나뉘어짐 없이, 분리됨 없이”라는 말은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한 말이다. 신성과 인성이 두 인격으로 나뉘게 되면 위격적 연합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성경이 말하는 성육신에 충실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정통파의 반응 2: “안휘포스타시스, 엔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 사용
이렇게 451년 칼케돈에서 선언한 것이 바른 입장이라고 선언되었음에도 일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일을 계속해서 동방의 일부 교회들은 단성론을 계속 주장하였고, 또 네스토리우스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얼마 뒤에 그리스도(로고스)께서 취하신 인성이 그 자체로는 비위격적(anhypostasis)이라고 말하였다.
비잔틴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 485–543)가 이 용어를 처음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말해야 성육신 이후에 두 위격이 있게 되는 네스토리우스주의적인 주장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분명히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성은 로고스의 “위격 안에”(enhypostasis) 있는 것이니 성육신 이후 그저 추상적으로 있는 것이 아님도 분명히 하였다. 그래서 이런 복잡한 용어를 사용해서라도 사람들의 오해를 방지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런 노력은 칼케돈 정의가 말한 것을 더 분명히 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과연 관심이 있는가?
우리들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듯하다. 그리스도가 두 위격을 지녔든지 한 위격을 지녔든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이런 무관심은 결국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가운데 신성과 인성의 변화를 시도하는 유티케스주의나 두 위격을 말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존재하게 하는 분위기가 된다.
우리 선배들이 피 흘리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성경적 입장을 잘 보존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성경과 이런 정통파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과거와 비슷한 유티케스주의 이단이나 네스토리우스주의 이단, 그리고 새로운 변형인 여러 이단들이 우리 주변에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1세기에서 5세기에도 많은 이단들이 있어서 교회를 혼잡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 시대에도 바른 교회 안과 밖에 많은 이단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벗어나는 이런 생각들이 바른 교회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온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이 한 위격 안에 위격적 연합을 이루고 있음”을 분명히 믿으며, 그 온전한 주님께 충성해 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신성으로 하신 것도 그리스도의 위격에로 돌리고, 인성으로 하신 것도 그리스도의 위격에로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신성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께서 전지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인성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은 모르신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고 칼케돈 정의에 충실한 성경적 입장에서 바르게 말하는 것이 된다. 신성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말하면서, 또한 인성에 근거해서 그가 배 안에서 주무셨다고 하는 것이다.
신성에 따른 것도 그리스도의 위격에로 돌리고, 인성에 따른 것도 그리스도의 위격에 돌리는 이런 입장이 과연 칼케돈 정의에 충실한 것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점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같이 간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한다면 우리들도 과거 선배들이 성경에 근거해서 제시한 켈케돈 정의를 깊이 생각하고 이것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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