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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목회자의 ‘신학함’과 팀 켈러
현대종교 | 채영삼 교수
2023년 08월 30일 08시 55분 입력

오래전 팀 켈러(Timothy James Keller, 1950-2023)가 쓴 ‘설교’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이 분은 단지 이론가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생각하고 행하는 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말씀에 충실한 조화롭고 균형 잡히고 살아 있는 설교를, 손에 잡히듯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센터처치』라는 책도, 기독교의 전통적인 문화전략들에 대해 현대적으로 잘 분석하고 정리해 놓은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귀한 주의 일군이, 존경과 사랑 속에서, 아름답게 사역을 마무리하는 것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차제에, 한국교회에 일어나는 ‘팀 켈러의 사역’에 대한 관심을 주목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한두 가지 생각을 나누어보고 싶다. 그것은, 팀 켈러가 말하는 전통적인 ‘은혜의 복음’과 또한 그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변증적인 전도’ 방식에 관한 생각들이다. 두 영역 모두에서, 그분이 발휘한 진지함과 탁월함에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사상(思想)에 있어서 그리고 문화적으로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그가 어떻게 경청하고, 어떻게 그들의 언어로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려 했는지, 그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자기 안에 있는 소망’을 이야기해내는 지혜로운 태도는 참으로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담대한 ‘확신’과 한결같은 ‘신실함’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에 대한 ‘온유와 긍휼’이 몸에 배이지 않으면 해 낼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집단적으로 양분하고, 즉각적으로 양극화하는 거의 ‘병적인’ 태도가 익숙한 이 땅에서, 교회인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는 ‘대체로 고압적이고 방어적이고 배타적’이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팀 켈러가 보여준 균형 잡히고 온유한 태도는, 복음 전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의 성품으로 소화한 경우라는 점에서, 우리를 부끄럽게도 하고 덕스러운 귀감이 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땅의 목회자들이 그분이 해냈던 복음사역 즉, 복음에 대한 이해와 그 복음을 전하는 문화전략을 모델로 삼는데 있어서, 조금 깊​이 들여다보고 고려해보아야 할 사항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팀 켈러가 ‘전통적인 복음’의 신선한 해석과 효과적인 전달로 ‘기독교를 떠난 청중들’에게 다가갔던 그 ‘상황’(context)이, 한국교회가 마주한 청중들의 상황과 그렇게 쉽게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 미국사회의 청중들은 그들이 비록 ‘다원주의적(多元主義的) 사상’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독교 세계’ 즉 ‘크리스텐덤’(Christendom)의 문화 속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청중들은, 그 대부분이 처음부터 애초에 기독교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는 ‘다종교적인(多宗敎的)인 다원주의’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것이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팀 켈러가 ‘탕자의 눈물’이 아니라 ‘탕부(prodigal father)의 은혜’를 이야기했을 때, 그런 호소가 기독교 사회 속에서 살아왔던 ‘기독교 적대적 청중’들에게는 그래도 ‘익숙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를테면 ‘문화적인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라고 부르는 ‘틀 안에 있는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똑 같은 ‘탕부’ 이야기를 생짜배기 한국사회의 청중들에게 전달하려면, 팀 켈러가 했던 것과는 훨씬 다른 노력과 접근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청중들은, 그런 ‘탕부, 은혜의’ 하나님을 전달하기 전에, 그런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상정해야 하는 낯선 문화적 환경, 즉 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의 색채가 훨씬 짙은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기독교 문명 속에 있어왔던 서구사회에서 ‘이단적인 사상, 반기독교적, 무신론적 사상’이라 해보아야 그것은 ‘집 나간 탕자’라는 기본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교적 배경 속에서 누가복음 15장의 그 ‘두 아들’의 이야기를 하신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 본연의 경험과 맞닿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의 차이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팀 켈러의 문화적 접근 방식은, 오늘 날 한국교회에서는, 한 때 교회에 다니다가 이제는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세대’에게 훨씬 적절하고 호소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생짜배기 한국사회의 청중들에게는, 조금 더 깊은 분석과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 번도 기독교 사회 즉 크리스텐덤을 경험한 적이 없는 청중들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면, 광화문에서 마이크 잡고 ‘할렐루야’를 외치면 그것을 보는 일반 시민들도 모두 ‘아멘’으로 화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를 떠난 탕자들’ 같은 청중들이 아니라 아예 ‘기독교적 전제들에 낯선’ 이방인들을 상대하면서, 그리고 ‘중산층의 세련된 문화’라는 배경 없이도, 이를테면 ‘동네 작은 교회’나 ‘건강한 작은 교회’ 그리고 ‘작은교회연구소’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꾸준히 이 땅에서 ‘선교적 교회’를 실험해 온 몇몇의 한국교회의 목회자 분들이 얼마나 귀한 노력과 시도를 해오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분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과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또 생각해 볼 것이 있다. 한국교회가 처한 한국사회가, 팀 켈러가 ‘은혜의 복음’을 새롭게 제시하고 그 복음을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그 ‘크리스텐덤’이라는 환경과는 다를 수 있는 요소 중 또 하나는, 미국이라는 강대국과 그런 강대국에 의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큰 영향을 받는 한국 사회의 많은 청중들, 그리고 그들 속에 놓인 기독교와 교회라는 상황이며, 이런 점도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그저 팀 켈러의 문화적 접근을 그대로 복사하기에는, 우리의 상황은 훨씬 더 많은 분석과 이해, 그리고 태도의 조정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팀 켈러는 전통적인 ‘칭의, 은혜의 복음’을 새롭게 전달하는 충실함과 신선함을 보여주었지만, 그것 역시 ‘집 나간 둘째 아들들로 구성된 크리스텐덤’ 안에서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던 유대인에게 ‘칭의의 은혜’를 설득력 있게 설파할 수 있었지만, 로마 세계를 상대하던 베드로나 요한의 경우에는 그런 ‘칭의의 은혜’에 관한 논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베드로나 요한은, 유대교라고 하는 ‘당시의 크리스텐뎀’이 아니라, 주로(!) ‘로마라고 하는 종교적으로 완전히 다신론적(多神論的)인 그래서 다원주의적’인 사회 속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향해 복음을 전달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 아래에서 행하는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오는 은혜’로 설명하기보다는, 당시 소망 없는 죽음의 땅이었던 로마라는 ‘피(blood)의 제국’을 이기는 ‘생명, 영원한 생명’이나 ‘살아 있는 소망’의 복음, 또는 ‘바벨론, 음녀, 짐승’으로 불리던 ‘로마라고 하는 세상’을 극복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를 상대했던 복음의 이런 해석들은, 크리스텐덤을 배경으로 할 수 없는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역시 ‘무한경쟁이라는 죽음의 그늘’ 아래 놓인 이런 사회 속에서 ‘무조건적인 은혜’만큼이나 ‘경쟁력 있고(?!), 변별력 있는’ 복음의 해석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목회자이든, 신학자이든, 성도이든, 각자 자신이 처한 시대와 상황의 자식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팀 켈러 목사님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귀한 사역의 모델이 되어주셨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존귀한 목회자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와 상황’을 직시하고 숙고하여, ‘자신만이 드릴 수 있는 복음적, 목회적, 신앙적 응답’을, 모든 겸손과 지혜와 덕을 발휘하여, 성실히 만들어가야 할 특권과 사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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