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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악마의 분별, 인격의 성장과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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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종교 | 채영삼 교수
2024.10.31 09:38 입력

이단들도 성경에 있는 신령하고 거룩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들이 성경에 없는 별난 말들을 지어 한다면, 성경을 떠난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쉽게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악령에 휘둘리는 이단들도 성경을 사용하고 성경적인 용어들로 말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분별이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마귀도 성경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하려 하지 않았던가(마4:6). 그러니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어떤 자가 십자가, 보혈, 언약, 새 하늘과 새 땅, 성령, 은혜, 보좌, 구원 등의 성경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그가 거짓 교사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수많은 비신자나 미숙한 신자가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 역시 성경을 사용하고 성경적 용어들을 뒤섞어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거짓 교사들은 성령을 자주 언급하며 성령의 역사까지 모방한다.

악한 자 마귀는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하고, 신기(神氣)를 발휘하여 장래 일을 예측하기도 하며,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을 모방하기도 한다.

그런 악마의 속삭임에 빠진 자들도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성령, 충만, 권능, 기적, 은사 등 성경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정말 그러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참된 역사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거짓 교사로 의심되는 자가 사용하는 성경적 용어들이 정말 성경적인지 아닌지 그 교리를 분석하여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소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학자들이 해주어야 할 몫이다.

하지만 보통의 신자들도 확실하게 거짓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열매’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르치는 ‘말’을 듣고 미혹되어 맞는 말 같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혹시 ‘잘못된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들 때는, 그 말만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기는 행동, 삶, 성품의 열매로 눈을 돌려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가르치신 바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6)는 말씀이 중대한 판별기준이 되는 것이다.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가 맺혀질 수 없다. 마치 어떤 나무가 자기는 ‘사과나무’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달린 열매가 먹을 수도 없는 ‘탱자’라면, 그 나무는 스스로 아무리 사과나무라고 우길지라도 결단코 사과나무일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역자의 경우도, 그 사역의 열매를 확인해 보고 나서, 실제로 그 가르침이 무엇을 전달하고 ‘어떤 종류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도 그러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성령의 역사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품과 삶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어떤 자의 가르침이 거짓 가르침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되거든, 그 가르치는 자와 그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 안에 이러한 열매들이 맺히고 있는지, 아니면 ‘증오, 절망, 다툼, 시기, 악독, 탐욕, 방탕’ 이런 악한 열매들이 맺히는지를 냉정하게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참된 말씀을 가르치는 공동체 안에도 이런 좋지 않은 결과들이 생기고, 그로 인해서 시험에 들고 연단을 받는 경우들이 많다. 연약하기 때문이다.

마치 밭에 좋은 씨앗을 심어서 그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가 올라와 자라지만, 동시에 그 옆에 잡초들도 무성하게 올라오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단지 그 ‘싹이나 잎을 보아서’ 알리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열매를 보아서’ 알리라고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열매는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맺어진 최종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어떤 공동체에 앞서 언급했던 악한 열매들이 ‘현저하게 그리고 상습적으로’ 맺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가르침의 결과일 수 있음을 알고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 있는 주요 이단들에게서 확인하듯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가정이 파괴되고, 인격이 능멸당하며 파괴되는 열매가 지속적이고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그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악한 열매들 중에서도 특히 ‘한 인격이 파괴’되는 현상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 거짓 가르침을 통해 역사하는 악마의 역사의 뚜렷한 특징이다.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는 원래 ‘공허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굶주림’에 의해 행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악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데’, 그런 악마에 휘둘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지배의 욕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통상 이단의 교주들이 이런 악마의 충동에 집요하게 사로잡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성경의 언어들을 교묘하게 엮어서, 자신들의 숨은 지배 욕구를 실현하는 속임수로 사용하여, 그 거짓 가르침의 올무에 걸려든 사람들의 영혼과 생명을 빨아먹는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껍데기만 남은 꼭두각시가 될 때까지 그 인격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루이스가 말하듯이, “사탄의 꿈은 모든 존재를 자기 뱃속에 집어삼켜서, 모든 존재가 오직 그를 거쳐서만 ‘나’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귀신 들림 현상과 유사하다.

마음의 상처나 약점으로 이미 어느 정도 무너져 있는 인격을 공략하여 온갖 거짓과 속임수로 그 인격 속으로 들어가, 나중에는 그 속에서 그 인격 자체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그 인격의 옷을 입고 더러운 악행을 일삼는 것과 같다.

성령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성령도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인격 안에 거하시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그 인격을 살려내시지, 그 인격을 짓밟고 소멸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특징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인격과 함께 거하시지만 도리어 자신의 위격(位格)을 감추실 만큼 우리 인격을 살아나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의 모든 은총으로 채워져 더욱 독특하고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고 발현(發現)하도록 도우신다.

결국, 성령과 함께 거하는 성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서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가장 자신답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꽃 피게 된다.

그러니까 성령은 자신의 ‘모든 충만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살려내시지만, 악마는 그 자신의 ‘공허한 굶주림’으로 인해 자신에게 사로잡힌 그 인격을 착취하며 파괴하고 마는 것이다.

들판에 비가 내리면, 그 들판에 피어 있는 꽃들이 모두 획일적으로 장미로 변한다거나 특정한 꽃으로 뒤바뀌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비가 내리면, 들의 꽃들은 모두 제각기 고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난다. 각자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성령이 역사하면, 자기 인격이 지워지고 소멸되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마의 속삭임이다.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살려내시고 성장시키신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말살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탄식하신다. 우리가 드려야 하는 기도와 간구를 우리 속에서 우리 모르게 우리 대신 드리시기까지 애통해하신다. 악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악마는 사람에게서 그 얼굴, 그 영혼의 형상, 그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버린다. 자신의 악한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의지와 생각을 지워 버리고, 감정을 강제하며 지배한다.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가르침을 들을 때에, 점점 더 자신이 억압되고 강제되고 인격적 판단과 선택의 자유가 사라져간다면, 그것은 길을 잘못 들어 미혹에 빠져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자기를 부인(否認)하라’는 것도, 이런 점에서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인격성’ 자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 자유 안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판단과 의지 자체를 지워버리고, 허수아비처럼 맹목적인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인격적 선택의 자유 안에서 깨어 있는 채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자신의 죄악 된 의지를 자발적으로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성령은 인격을 짓밟지 않으신다. 함부로 ‘지배’하거나 ‘강제’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파괴하여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으신다. 도리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안에 하나님의 영과 하늘의 모든 은총으로 충만하게 채워 그 인격을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사랑으로 살려내시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 자신이 되어 빛나게 하신다.

종종 이단의 교주들이나 거짓 교사들이 그 추종자를 자신의 탐욕을 관철하는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시켜 그 인격을 파괴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을 ‘물화’(物化)시키는 악한 자 마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종교적 권력으로 신앙이 연약한 자들을 갈취하고 착취하고 굴종시키려는 충동에 굴복하는 자는 악마의 속삭임에 빠져드는 자이다. 그런 자는 결국 그 연약한 성도의 인격을 파멸시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假裝)하여 신(神) 놀음 하는 자들이 맺는 악한 열매의 특징은 ‘인격성의 파괴’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목에 걸 ‘연자 맷돌’을 수집하는 저주받은 자들이다.

주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6)고 하신 엄위한 말씀을 기억하고, 양 무리를 맡은 자들은 언제든지 두렵고 떨림으로 성도를 섬겨야 한다.

 

성령과 악마의 분별, 인격의 성장과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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