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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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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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3 08:46 입력 | 2019.12.13 09:04 수정
이 글을 작성한 최재영 목사는 북한을 직접 방문해 북한의 통일교 교회와 사업체를 돌아보고, 북한과 통일교의 관계와 사업체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북한에서 통일교를 만나다>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⓵평화자동차 부속품 상전 건물 모습 ⓶평화자동차 부속품 상점 내부 모습⓷평화자동차가 직영하는 연유공급소(주유소) 전경 ⓸평화자동차가 직영하는 연유공급소(주유소)내부 모습 ⓹평화자동차가 직영하는 연유공급소(주유소)에서 여성봉사원이 주유하는 모습 (사진출처: 최재영 목사) |
평화연료공급소(연유공급소) ▲최재영 목사
NK VISION KOREA 대표 |
평화자동차는 대북기업 최초로 평양 시내와 남포에 주유소 사업을 시작했는데 평양 시내는 ‘평천구역’, ‘광복구역’, 서성구역’ 등 세 개 구역과 ‘남포시’를 포함해 모두 네 곳에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북에서는 주유소를 ‘연료공급소’나 ‘연유공급소’라고 부르며 주차장을 ‘차마당’이라고 부르는데 필자가 방문한 곳은 보통강변 인근에 있는 평화자동차가 운영하던 연유공급소였다.
매우 친절한 여성 한 명과 남성 한 명이 유니폼을 입고 주유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북에서는 주유용 기름이 값비싼 원료라서 직원들이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유원들을 채용할 때는 매우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 위주로 엄선한다고 했다.
연유공급소는 정부가 직영하지만, 자동차 소유층들이 증가하면서 돈이 벌리는 사업이 되다 보니 최근 신흥 부자들도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고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요즘은 평화자동차가 평양 거리를 부쩍 누비고 다니기 때문에 도로 정체 현상이 생기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주차공간 문제도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또한 필자가 직접 확인한 바로는 김일성광장과 평양역을 잇는 큰 대로 곳곳에는 CCTV가 많이 설치돼 있었고 평양역 광장에는 주차비를 징수하는 여성들이 상시 근무하며 운전자로부터 주차비를 징수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운전자들이 주유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주유소를 방문해야 하는데 북에서는 남측이나 해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주유 문화가 있었다. 우선 ‘기름 딱지’를 받는 주유소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 딱지는 일종의 ‘주유 쿠폰’과 같았다. 이 딱지를 주유소에서 구입해 소지하고 다니다가 본인이 주유할 때 현금 대신 주유원에게 건네주면 된다. 주로 유로화나 미화로 판매되고 있었는데 한 장에 10유로짜리도 있고 장거리 운전자들을 위해 300유로 짜리도 판매한다.
또한 장거리 운전자들은 비상 상황을 대비해 석유통에 따로 담아서 차량에 싣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는 시골이나 지방에는 주유소가 많지 않아 연료가 떨어지면 바로 채워 넣기 위해서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대북사업을 계획하던 남측 정유회사들이 북에서 주유소 사업을 계획하던 중 갑자기 5·24 대북 제재 조치가 발표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발빠른 중국기업들이 북에 주유소를 설립하기 위해 평양에 진출했다고 한다. 주유소 사업에 진출하는 중국기업은 민간기업 2개사와 국영기업 2개사였는데 북중 합작회사인 ‘중투신융국제투자관리유한공사’(이하 중투신융)와 MOU를 체결했다고 한다. 중투신융은 2003년에 설립한 국제투자 전문회사로 북중 교류, 해외투자, 금융, 지하자원 개발 등을 하는 기업이라고 한다. 과거 북 당국은 인도와 이집트 등에서 원유를 수입해 왔으며 최근에는 중국이 해마다 원유 50만 톤을 북에 수출하고 있으며, 무상 또는 장기 차관 형식으로 50만 톤 정도를 원조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알아보니 평양 시내는 평화자동차 주유소 외에도 일반 주유소가 30여 개 더 있는데 이 중국기업 4개사는 1차로 평양에 주유소 14개를 더 세우고 2차로 전국에 220개를 더 세울 계획이며 북측과 중국 측 기업 4개사가 50%씩 이윤을 나누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석유는 중국산보다 러시아산을 공급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의 대북 수출량 가운데는 석유가 55%를 차지하기 때문이며, 러시아산 석유가 중국산보다 저렴하고 질이 좋아 북측 인민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 밀리지 않으려는 러시아 회사들도 북에 주유소 체인망을 설립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북에는 외화만 있으면 누구든지 자동차 외에도 개인 소유의 ‘오토바이’나 ‘써비차(영업용 차량)’에 언제든지 연료를 넣을 수 있다고 한다. 거래되고 있는 휘발유 가격은 대략 1kg(1.4L)에 중국 돈으로 9위안 정도에 팔리고 있다. 연유공급소 외에도 시중에서 주민들끼리 서로 거래하는 기름은 대부분 러시아산이며 당국에서도 묵인하고 있다고 한다. 평화연료공급소를 비롯해 모든 연유공급소에서는 주로 휘발유(연유)와 디젤유를 판매하고 있다.
요즘은 평양 시내에 택시들도 무척 늘어났고 승용차도 많아졌는데 특히 평양 시민들이 유선전화나 휴대전화로 ‘186번’을 눌러서 택시를 부르고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주유소가 드문 북에서는 운전 도중에 연료가 떨어지면 교통 보안원이 해결한다고 한다. 교통보안원은 경찰청에 해당하는 인민보안부 소속인데 이들은 교통 위반으로 적발된 차량으로부터 벌금 대신에 일정량의 자동차 연료를 빼내기 때문에 항상 석유를 보유하고 있어 비상시에 공급이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북에 진출해 주유소 사업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는 우리들의 미래 시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보았다.
평화무역
2005년 5월 설립된 ‘평화무역’은 평화자동차 회사 계열의 대북 무역회사로서 대표이사는 박상권 회장이다. 자동차부품, 완성차(CBU) 등 자동차 관련 품목 뿐 아니라 다양한 대북지원물자, 건축자재 등을 취급해 왔다. 특히 그동안 다양한 북한산 제품 등을 국내외로 수출하거나 수입하기도 하며 거래되는 무역 품목들을 운반하고 수송하는 업무를 담당해 왔다.
대북사업이다 보니 주로 중국 단동에 설립한 지사가 가장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해왔으며 북측 신의주를 통해 평양까지 각종 물류사업을 전개해 왔다. 평화무역 지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동지사는 ‘단동평화무역유한공사’라는 법인으로 등록돼 있으며 현재는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지 않다.
평화토건
‘평화토건’은 평화자동차회사의 계열사로서 2000년 1월에 설립된 건설회사이다. 대북사업을 위한 건설 전문기업으로 발족한 이 회사는 2000년 2월에 시작된 평화자동차 남포공장 건설을 필두로 2008년에는 평양 시내 중심가 보통강호텔 앞 부지에 세계평화센터 빌딩을 10년간에 걸쳐 건설하기도 했다. 평화토건에 의해 평화센터 내부 3층에 통일교 예배당이 세워져 있다. 남측 법인회사가 북측에서 공사를 한 것은 최초이며 완공 후에도 건물 운영권을 소유하는 것도 남북 역사상 최초로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그동안 왕성하게 대북 건설사업을 추진해 온 평화토건은 현재 그 활동이 소강상태에 있다.
평화항공여행사
평화항공여행사는 2003년 4월 11일에 설립한 대북 전문 관광회사로서 평화자동차 대표를 역임한 박상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평화자동차 계열사였다. 이미 일본의 계열회사를 통해 1993년부터 평양, 백두산, 금강산 관광을 실시하고 있었으며 2003년도에 국내 최초로 평양 관광과 백두산 관광을 시작했다. 2004년도에는 여행사 주관으로 중국 심양에서 ‘세계여자프로권투대회’를 개최하면서 스포츠 이벤트 분야를 새롭게 시작했다.
그 후 2005년 3월에는 ‘심양세계여자프로권투대회’, 6월에는 ‘평양세계여자프로권투대회’를 열었고 8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평양골프장에서 2005년 ‘평화자동차배 KLPGA 평양오픈 골프대회’를 개최하는 등 남북의 스포츠 외교까지 그 영역을 확대했다.
평화항공여행사의 운영은 통일교가 대북교류사업 차원에서 전개한 관광사업이지만 그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대북 포교활동 차원에서 오랜 기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추진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와 해외동포 2000명이 평양을 관광한다는 프로젝트를 세워 남측 통일부를 상대로 ‘남북경제협력사업자’ 신청을 제출해 승인을 받았는데 이는 금강산관광총회사와 평양관광사업 계약서를 체결한 평화항공여행사가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평화위’ 명의의 확인서를 발급받아 통일부에 사업 승인을 신청했던 것이다.
관광코스는 평양, 남포 관광, 묘향산, 백두산 관광은 물론 평북 정주에 있는 문선명 총재의 생가와 인근의 세계평화공원 조성지 등이 포함됐는데 기존의 방북 관광 비용보다 저렴한 비용을 책정해 고객들에게 인기상품으로 각광받았으며 실제로 2003~2005년까지 3년간 약 5000여 명의 관광객이 평화항공여행사를 통해 북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 관광상품을 이용한 고객들 대부분은 통일교 신도들 위주였는데, 이는 통일교 신도들이 북 인민들을 직간접으로 접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대북 포교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통일교의 일반 신도들이 문선명 총재의 평북 정주 생가와 그 인근에 조성 중인 ‘정주세계평화공원’을 방문하는 일정은 통일교 창시자이자 교주로서의 문 총재에 대한 평신도 교육과 홍보 측면에 큰 기여를 해왔다.
금강산국제그룹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 박보희와 금강산그룹 박경윤 회장이 공동 주주로 참여해 세운 통일교의 대북 사업 창구이다. 이 금강산그룹에서 평화자동차총 회사 설립을 주도한 것이다.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펼쳐오던 통일교가 1987년 5월 15일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출범시키며, ‘승공(勝共)운동’에서 ‘남북평화통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며 1991년 4월에는 소련을 방문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져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었고 연속으로 그해 11~12월에는 북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을 열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 대북사업의 초보자였던 통일교가 도움을 받기 위해 두드린 대북 창구는 당시 유일하게 북과 외부 세계를 연결해주던 박경윤 금강산그룹 회장이었다. 북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통전부는 4·19의거를 계기로 1961년 5월 13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라는 산하기관을 만들었는데, 1988년부터 북을 드나든 박경윤 회장이 이 조평통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일교는 이 박경윤을 통해 조평통의 전금철 부위원장을 접하게 되며 인연이 시작된 것이며 그러던 중 통전부는 1994년 5월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창구로 기존의 조평통과는 무관하게 아태평화위는 기관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평통은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통일교의 대북사업 파트너도 조평통에서 아태평화위로 변경된 것이며 금강산그룹은 통일교와 아태평화위를 연계하고 중개하는 그룹이 되어 결국 금강산국제그룹 지분을 통일교와 아태평화위가 각 40%, 박경윤씨가 20%의 지분 구조를 갖는 회사로 재편성된 것이다. 과거의 통일교 입장에서는 가장 큰 적(敵)으로 여겼던 공산당 단체(통전부)와 동침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금강산국제그룹 회장 직함은 박경윤씨와 통일교의 박보희씨가 공동으로 맡게 되었다. 이에 대해 박경윤 회장은 “박보희가 나를 찾아와 금강산그룹의 공동회장직을 달라고 요청해서 수락했다”고 해명하면서 자신과 금강산국제그룹은 통일교와 별개의 기업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동안 일심동체로 통일교와 합작으로 사업했던 기업이기 때문에 통일교와 무관한 회사라고 보기 힘들다.
1991년 12월 6일 문 총재와 김 주석의 회담에서 논의한 경제교류는 크게 금강산 개발과 자동차 사업이다. 금강산 개발은 금강산국제그룹이 북측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홍콩의 세계적인 개발조사 전문회사에 용역을 의뢰, 약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금강산 개발에 대한 계획서와 타당성 조사 보고서를 내놓았으며 김일성 주석이 타계하기 직전이던 1994년 박경윤 회장과 박보희 회장이 김 주석을 찾아가 비준을 받은 것이다.
금강산국제그룹은 금강산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오염되지 않은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취지 아래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플랜을 세웠는데 초기 단계에서 연간 50만 명, 최종 완료 시점에는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목표로 계획을 수립했다고 한다.
초기에는 금강산 지역을 개발하고 후속 단계에서는 원산 방향의 해안지대를 따라 북쪽으로 지경을 넓혀가기로 했다. 1994년 1월 27일 자로 김일성 주석의 친필 서명까지 받아낸 ‘금강산 관광개발 타당성 조사’를 통해 금강산국제그룹은 북 정무원으로부터 50년 동안 금강산 관광개발 예정지 안에 있는 토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아냈다.
그런데 1998년 느닷없이 현대그룹 측이 아태평화위 김용순 위원장으로부터 전격적으로 서명을 받아내 금강산 개발권을 확보했던 것이다. 북에서는 김 주석이 서명한 사업은 소위 ‘불가침’으로 통하는 것이 관례인데 금강산국제그룹의 지분을 소유한 주주이기도 한 아태평화위가 현대그룹과 계약을 맺고 금강산 개발권을 넘겨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강산 개발권을 현대그룹에 넘겨준 이유와 결과에 대해 북 당국은 적절한 해명이 없었고 박경윤 회장과 통일교 박보희 회장 측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지만 통일교 측은 이 문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자동차 등 다른 대북사업을 위해 금강산 개발권 문제를 덮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이후 통일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 뜨거운 햇볕정책을 고수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⓵대북건설업체 '평화토건'이 평화자동차 남포공장 건설을 위해 기초공사를 하는 장면 ⓶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이 김양건 회장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2011.2.16) ⓷2013년 2월, 김정은 위원장이 박상권 회장을 통해 통일교 한학자 총재에게 선물로 보낸 풍산개 암수 두 마리가 가평 천정궁에서 개최된 통일교 절기행사인 '천인국기원절' 경축 오찬장에서 전달되고 있다 ⓸2009년 1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문선명 총재의 90회 생일잔치에 박상권 회장을 통해 90년산 산삼 선물을 전달하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최재영 목사) |
김정은 위원장이 한학자 총재에게 보낸 풍산개 한 쌍 문선명 총재 사후 통일교는 한학자 총재를 중심으로 1만 2000쌍 국제합동결혼식 등 여러 가지 대규모 행사를 거뜬히 치러내는 등 한 총재의 지도 아래 흔들림 없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듯 보인다. 게다가 지금까지 각인된 ‘사이비 정치집단’ 혹은 ‘이단 종교기업’이라는 오명을 벗고자 한국 사회와의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활 종교’ 혹은 ‘국민종교’로의 변모를 모색하고 있으며 북측과는 문 총재의 죽음으로 인한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새로운 대북사업을 모색 중에 있다. 한 총재는 2015년 5월 국내 최초로 일반 언론 기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자신의 대북관과 대북사업에 관한 생각을 아래와 같이 내비쳤다.
“나는 평생 위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나라를 위한다면 못할 게 없죠. (방북) 시기를 보고 있어요. 되도록이면 양쪽(남과 북의 정부) 면을 세워 줘야 하잖아요. 북한에서는 (우리에게) 지극정성이에요. 문 총재님과 김일성 주석과의 관계는 굉장히 끈끈했어요. 김정일, 김정은 위원장이 다 (통일교에 대한 김일성의) 유지를 받들었어요.”
특히 자신은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이미 초청장을 받아놓은 상태라고 언급했으며 한 총재의 대북관은 아직 통일교 교주로서의 시각에서 북을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2013년 2월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박상권 회장을 통해 풍산개 암수 두 마리를 한학자 총재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는데 이 풍산개들은 통일교 성지이자 본부로 알려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송산리’ 천정궁박물관에서 전달됐다. 통일교 절기 중에 하나인 ‘천일국 기원절’ 경축식 오찬 자리에서 한 총재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에 앞서 문 총재의 90세 생일이던 2009년 1월 30일에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낸 90년 된 산삼 전달식이 가평 ‘천주청평수련원’에서 있었다. 당시 문 총재의 90세 생일잔치 자리에는 10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했는데 박상권 회장이 북에서 들고 온 선물 보따리에는 90년, 80년, 60년 된 산삼 세 뿌리와 함께 축하의 글을 자수로 새긴 리본과 더불어 장미꽃 90송이와 백합 90송이를 담은 화병과 화환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문 총재의 90회 생일뿐만 아니라 매년 생일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다. 이처럼 양측의 최고지도자는 대를 이어 서로 끈끈한 우정과 의리를 나누며 밀착관계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조선은 그 동안 자주적인 남북통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기독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들이 자국에 유입되거나 확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는 북이 종교 자체를 무조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남한이나 미국에서 유입된 종교들을 통해 자칫 인민들이 잘못된 사대주의에 물들거나 그 동안 지켜왔던 반일반미정신과 반제정신이 쇠퇴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종교 때문에 통일지향적인 민족정신과 자주정신을 갉아먹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며 선교를 빌미로 북 영토에 지하교회를 조직해 북 체제를 비판하거나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 때문에 북측은 쉽사리 남한이나 미국 교회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통일교만큼은 예외로 대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통일교는 남과 북 모두에 교두보를 확보했기 때문에 본격적인 통일교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사회 각 분야를 향해 전면적으로 뛰어 들고 있다. 평화자동차그룹의 박상권 회장이 통일부에 남북 경제협력사업자승인 취소를 신청(2012년)함으로써 이제 통일교는 평화자동차와의 인연을 모두 끊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평화자동차에 투자했던 통일그룹은 자동차 사업을 접는 대신, 유통업이나 다른 사업계획으로 전환하며 기존의 자신들의 대북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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