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울과 할례, 예수와 안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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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구 박사의 안식교 교리 비판
- 현대종교 | 이상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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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3 08:37 입력 | 2022.12.23 08:39 수정
이상구 박사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뉴스타트, 엔돌핀 등 건강세미나로 이름을 알렸다. 1982년 미국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에 입교했고, 구원론, 조사심판 등의 교리가 맞지 않음을 깨닫고 2018년 「미주중앙일보」를 통해 공개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현재 이상구 박사는 뉴스타트센터를 운영하며 질병의 원인을 밝히고 제거해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데에 힘쓰고 있다. [편집자 주]
필자가 안식교에 입교한 또 다른 이유는 ‘모세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이 명칭만 다르게 기록하였지, 실제 내용은 전혀 다르지 않고 동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세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이 동일한 것이라면 모든 성도들이 여전히 ‘모세의 계명’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정하고 ‘모세의 계명’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옳다. ‘모세의 계명’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몸에 쉼을 가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음의 쉼은 전혀 언급이 없다.
모세의 율법에 ‘할례’가 있다. 이 모세의 할례도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몸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다. 바울에게는 할례가 모세의 율법 중에서 대표선수였다. 예수께는 안식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할례가 안식일 계명보다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들이 태어나면 8일째에 반드시 할례를 주어야 하는데, 만약 그날이 안식일일지라도 할례를 시행할 만큼(요7:22, 23) 할례가 중요하였다. 이 중요한 율법을 준 모세는 놀랍게도 할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따로 예언하였다.
신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그러므로 모세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몸’에 ‘사람의 손’으로 받는 할례, 곧 ‘모세의 할례’는 참 할례가 아니라, 장래에 예수께서 오셔서 ‘하나님’(성령)이 직접 ‘마음’에 주려는 그 할례가 참 할례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위의 말씀을 따로 기록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의 할례를 상징하는 몸의 할례를 받았으나, 실상 반드시 받아야 할 마음의 할례를 주시려는 성령을 거부하지 말라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예례미아 선자자도 이스라엘이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며 몸의 할례만을 받고 겉으로 거룩한 척하며 영적으로 거만을 떨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렘9:26).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성령의 음성을 받아들이고 마음에도 할례를 받은 선지자들은 모세의 율법, 곧 ‘몸의 할례’는 성령의 거듭남, 곧 ‘마음의 할례’를 약속하는 상징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도 마음의 할례가 없으면 몸의 할례는 형식적 겉치레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전서 7장 19절에서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 곧 성령이 주신 마음의 거듭남으로 받은 ‘마음의 안식’을 믿음으로 지킬 따름’이니라고 기록하였다. 모세의 계명(몸의 할례)은 하나님의 계명(마음의 할례)의 상징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계명’에 있는 안식일, 곧 ‘몸의 휴식’을 가지라는 안식일 계명 역시도 성령의 역사로 마음의 할례를 받고 거듭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성령의 역사로 ‘마음에 받는 안식’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명’(언약)을 약속하시며, 상징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거듭남이 없어서 마음에 받는 안식이 없다면,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마음의 쉼’을 받지 않고 몸의 쉼을 쉬라는 모세의 안식일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면, 모세의 몸의 할례는 받았을지라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마음의 안식을 얻은 참 성도들에게는 모세의 안식일(몸의 쉼)은 형식과 상징으로서의 율법일 뿐이다.
따라서 몸의 할례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고전7:19) 모세의 안식일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세의 계명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만을 지키겠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세의 율법(할례만이 아닌)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며 말했던 것이다.
갈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이 말씀에서 ‘날’은 모세의 계명의 안식일이다. 절기 안식일이 아니다. 절기 안식일은 절기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절기를 지킨다면 당연히 절기와 함께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날’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날’이란 절기에 포함되지 않은 매주 일곱째 날(안식일), 그리고 ‘달’은 매월 첫째 날(월삭)을 뜻한다.
다시 할례로 돌아가서, 율법에 기록된 ‘모세의 할례’라는 것은, 장래에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손(성령)으로 ‘하나님의 할례’를 몸이 아니라, 마음에 주시겠다는 약속을 표징(상징)하는 것일 뿐이라는 뜻을 모세 자신이 스스로 신명기 30장 6절에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마음에 주시는 참 할례를 받으면 죄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너의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모세의 율법도 명령이 아니라 약속임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성령이 마음에 하시는 할례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다(골2:11).
골2:11 또한 너희가 그의 안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의 몸을 벗어버린 것이라
죄의 몸(육신)을 벗어버리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이 재림 때에 흙으로 만들어진 땅에 속한(고전15:40, 49) 썩을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창3:19) 썩지 않는(고전15:42, 53) 영적 몸(고전15:44, 45), 천사와 동등한(눅20:36) 존재로, 새로운 인간이 아닌 새로운 피조물로(고후5:17) 재창조되어 부활을 뜻한다.
그러므로 참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는 죄인들의 죄의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여 죽는 죽음(롬6:6)을 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죄인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롬6:7). 죄에서 벗어나면, 모세의 몸의 안식이 아닌 성령의 ‘마음의 할례’를 받아 마음의 안식, 곧 ‘그리스도의 안식’, 곧 영원한 안식’, 또는 ‘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히4:3)이다.
즉,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안식을 얻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또 ’모세의 할례는 몸에 하는 것처럼, ‘모세의 안식일’은 몸의 쉼을 쉬는 날이다. 따라서 ‘모세의 할례’와 ‘모세의 안식일’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모세의 할례’가 ‘그리스도의 할례’를 약속하고 상징한다면, ‘모세의 안식일’도 역시 ‘그리스도의 안식일’을 약속하고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할례’로 거듭남은 성령이 마음에 주시는 구원(생명)과 그 구원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며 재림 때에 부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골2:12 너희가 세례(그리스도의 할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보혜사와 함께 주신 ‘그리스도의 할례’는 성령으로 거듭남의 구원과 함께 시간과 날짜의 제한이 없는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안식’(나의 안식, 그의 안식, my rest, his rest–히4:3, 4:11), 곧 영적 안식을 누리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부활을 약속하는 ‘새 언약’(신약)이며 ‘하나님의 계명’이다. 더 이상 제한된 24시간 동안의 몸의 휴식을 매 7일마다 누리라는 ‘모세의 안식일’이 아니다. 그리고 ‘영원’에는 날(시간)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세의 안식일’은 있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의 안식일’은 특별히 제한된 정해진 날짜로 있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안식’, 영원한 안식만 있을 뿐이다.
이제, ‘모세의 할례’와 ‘모세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할례’ 안에 함께 포함되어 있는 언약의 상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할례’는 침례를 뜻하고 있고(골2:12) 구원, 그리스도의 안식, 부활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에도 ‘할례 계명’이 ‘안식일 계명’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할례’를 ‘모세의 안식일’에 ‘모세의 할례’를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할례’는 부활이라는 재창조의 새로운 약속, 곧 ‘새 언약’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모세의 계명’이 십자가로 완전케 되면 불완전했던 ‘모세의 율법’(계명)이 마침내 십자가로 ‘최고의 법’(약2:8) ‘완전한 법’(약1:25), 곧 사랑의 법이 되는(롬13:8) 것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간 성도들에게 하나님(성령)께서 직접 ‘하나님의 계명’, 곧 ‘새 계명’(요13:34), 곧 ‘새 언약’으로 부활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모세의 계명’은 구원의 약속의 상징의 차원이라면 ‘하나님의 계명’은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재창조의 약속을 이루어주셔서 모든 성도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천사와 동등하게 재창조하시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과 다름없이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마5:44~48) 새로운 피조물, 천사와 동등한(눅20:36) 피조물, 육적 존재가 아닌 영적 존재, 곧 영(神)적 존재(요10:34, 35)로 부활시켜 주시겠다는 새로운 약속, 곧 ‘새 언약’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언약)’, 곧 ‘그리스도의 계명’(나의 계명)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기록하였다.
고전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 모세의 율법 중에 하나를 범하면 모든 율법을 범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약2:10).
여기서 할례는 분명히 모세의 율법(계명)를 뜻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모세의 할례법을 거부한다면 모세의 안식일을 포함한 모세의 온 율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안식일 율법(계명)을 포함한 모세의 모든 율법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을 약속하며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5:39).
그러므로 모세의 ‘할례’란 그리스도의 할례(성령의 거듭남)로 구원의 안식과 부활을 성령으로 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이루어진 약속일 뿐이다. 모세의 율법책(의문)의 율법들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랑’(은혜)이라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8:2)으로 십자가에서 완전케 하셨다(롬13:8).
따라서 모세의 율법(죄와 사망의 법)은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갈5:6).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하나님의 계명)과 성령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몸의 쉼(안식)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도 몸의 쉼을 개의치 아니하고 안식일에 일하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어 마음에 할례를 주시어 마음에 안식을 주시는 “완전케 된 안식일” 계명, 곧 ‘그리스도의 안식일’을 지키신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몸의 쉼, 곧 모세의 안식일에만 형식(율법)적으로 집착하면서 마음의 쉼을 주시는 성령의 거듭남을 거부하며, ‘그리스도의 안식’, 곧 마음의 안식을 주시려는 예수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정죄하며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율법을 폐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율법책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의 음성을 들으면 더 완전케 된 사랑이라는 하늘의 법대로 성령께서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어 모세의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보다 더 굳게 세우실 것이다(롬3:31).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할례도 성령이 마음에 할례를 주시어 거듭난 자들에게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을 주장하는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 없이 망나니로 살고 싶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안식을 누리며, 이제 몽학선생(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전에는 들리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던 성령의 음성으로 인도하심을 따르게 된다.
그러면 계시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계12:17, 14:12)을 ‘모세의 계명’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남은 자, 곧 144,000이 되는 조건이 모세의 계명 속에 있는 안식일을 하나님의 인이라고 주장하는 안식일 교단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참 ‘하나님의 인’은 성령이 마음(이마)(계14:1)에 성령으로 인 쳐주시는(엡1:10) 것이며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신30:6).
모세 자신도 ‘모세의 계명’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약속하시는 약속이며, 상징이라고 기록하였다. ‘모세의 안식일’ 계명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하여 주실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신 언약이었고, 상징(표징)이라고(출31:16, 17) 모세 자신이 분명히 기록하였다. 에스겔 선지자도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그에게 주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겔20: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성령만이 계신다. 모세의 율법 속의 할례와 안식은 그분들이 주시는 선물(거듭남과 죄로부터의 안식, 부활)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을 뿐이다. 모세의 계명을 고집하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이 율법을 대신하여 사랑의 법(최고의 법)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갈4: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율법)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갈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그렇다. “눈에는 눈, 이는 이로”, “이혼증서를 주어 아내를 버리라”와 같은 모세의 율법들은 성령의 생명의 법, 사랑의 법에 비하면 너무나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초등 학문을 완전케 하시면서, 원수에게 복수하지 말고 오른빰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령의 가르침을 주시어 천했던 모세의 율법(초등 학문)을 십자가를 통하여 최고의 학문, 최상의 법(약2:8), 완전한 법(약1:25)으로 완전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도 모세의 율법(구약성경의 모세오경)이 모두 그리스도 자신의 오심에 대하여 기록한 것(요5:39)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 곧 ‘새 언약’을 주시면서 부활을 약속하신 것이다.
다음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아버지의 계명’, ‘나의 계명’이라고도 부르신다. 모세의 율법, ‘옛 언약’(구약)은 그리스도 자신의 오심으로 완전케 하셨고, 이제는 ‘아버지의 계명’(내 계명), 곧 새 언약(신약)을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부디, 과거 40년 전에 필자가 복음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오해했던 대로 ‘모세의 계명’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하여 ‘모세의 계명’대로 안식일(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영적 정직성이라고 주장하며 안식일 교회에 입교했던 옛 오류를 벗어나게 하여주신 성령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모세의 옛 할례’는 지나가고, 보라, ‘그리스도의 새 할례’가 온 것처럼, 보라, ‘모세의 옛 안식일’은 지나가고 ‘그리스도의 새 안식’이 왔도다! 모세의 계명(옛 계명)은 지나가고 ‘그리스도의 계명’, 곧 ‘하나님의 계명’(새 언약)이 왔도다.
꼭 기억하자! “토요일에 일(몸)을 쉬는 것도, 쉬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다.” 그렇다. ‘모세의 계명’(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로 끝났다(눅16:16). 십자가에서 모세의 율법(행위의 법)을 사랑의 법(믿음의 법)(롬3:27)으로 다 이루시고 완전케 하셨기 때문이다(마5:17).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모세의 할례와 안식일로 돌아간 것처럼,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안식’에 들어가야 할 자들이 아직도 모세의 안식일에 머물지 않기를 기도한다. -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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