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선교단체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도래는 복음전파의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어디 일부 선교단체에 국한된 믿음일까. 자세히 파헤쳐보면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보수적 신앙 전통에서 자란 적잖은 사람들은 이 종말론적 조급증에서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한 세기가 바뀌거나 999년, 1999년 등, 천년 단위가 바뀔 때마다 그 종말을 특정한 시점에 못 박고 싶어 하는 갈망은 연약한 사람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곤 했다.
아무리 예수께서 그 종말의 날과 그 때는 아버지 외에 아무도, 심지어 천사와 아들조차 모른다(막13:32)고 말씀하셨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기중심적 사고의 패턴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기어코 그 날과 그 때를 자기의 살아생전 특정 시점에 붙잡아두길 집요하게 갈구한다. 참 모진 집착증이다.
물론 그 주관적인 소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신약성서를 샅샅이 뒤져 찾아보니까 그 무지의 정보를 상쇄할 만한 야릇한 증거가 힌트로 나오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이런 갈망에 사로잡혀 그것을 즉각 교리강령으로 삼아 맹렬하게 활약하는 사람들은 그 야릇한 증거의 문자주의 독법에 목매달고 산다.
가령 이런 구절은 어떤가.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마10:23), 또 이런 구절은 얼마나 유혹받기 쉬운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 먼저 전자의 구절을 문맥이나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게 주워섬기면 영락없이 예수의 재림은 이스라엘 복음화가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발생해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그 맥락의 전후좌우를 살피면 이 구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전도자로 파송하면서 내리신 지침의 일부에 해당된다. 거기서 그들은 이방인의 고을이나 심지어 사마리아 마을로도 다니지 말고 오로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 국한하여 다니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복음화와 인자의 재림을 직결시키기보다는 종말의 긴박성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후자의 구절도 마찬가지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말씀하신 종말 예언이 이 구절의 전후 맥락으로 제시된다. 그 맥락의 역사적 정황인즉, 이 복음서의 저작 시점을 감안할 때,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모든 민족’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의 어느 민족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희랍어 문구(ethnoi)는 이방족속들을 가리키지만 예수 이후 이천년 가까이 다양한 이방족속들은 생겨났다가 더러 사라지기도 하고 또 복잡하게 뒤섞이기도 했다. ‘온 세상’ 역시 성서 특유의 과장법으로 복음의 보편성과 그 전파 대상의 포용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으로 읽는 게 무방하다.
예수 이후, 수많은 민족의 수많은 생명들이 가고 또 새로 왔지만,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광활하고 변함이 없어 ‘모든 민족’과 ‘온 세상’을 포기하지 못할 정도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 모든 백성들을 다 구원하신 뒤에야 ‘끝’을 허락하시는 그 분은 얼마나 자비롭고 얼마나 참을성이 대단한가.
이런 몇몇 구절을 오해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시점을 못 박고 자기의 살아생전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연출하고 싶어 안달하는 자폐적인 신앙인들, 또 삐딱한 이단적 분파주의자들을 경계하고자 하셨음일까.
앞의 구절이 나온 뒤 얼마 가지 않아 동일한 성전 파괴 및 예루살렘 멸망 예언의 도중에 그는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24:44).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 예측불허의 돌발성만은 암시로 남겨둠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또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의 향락에 도취하여 대책 없이 살기보다 늘 경성하고 근신하는 자세로 주의 뜻을 구하며 살도록 도전을 주고자 하신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삶의 긴장을 가지고 꾸준히, 성실하게, 그러나 이로 인해 너무 안달하기보다 주 안에 머무는 자답게 평강의 심지를 붙들고 좀 느긋하고 여유 있게 우리는 복음 전파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겠다. 다시 말해, 오로지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 그 견고한 삶의 자세와 실천의 용기, 그게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이요 땅 끝 신앙을 체현해내는 관건인 셈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혹자는 이 유명한 말씀에서 또 ‘땅 끝’의 문자적 함의에 집중하여 그 시한부적 비밀코드에 골몰할 게다.
바울은 그 ‘땅 끝’을 당시 유럽 대륙의 서쪽 끝이었던 서바나(=스페인)라고 봤지만, 오늘날 조금 덜떨어진 장삼이사들은 그 지역을 오지의 미전도 종족, 또는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조금 덜떨어진 상태에서 아주 많이 덜떨어지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조심하자.
그 땅 끝은 오늘날 지구촌에서 참 모호하고 추상적인 지역명이다. 땅 끝을 향해 자꾸 걸어 나가다보면 온 세상의 사람들 다 만나고, 지구는 둥그니까, 다시 시작한 출발선으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역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 복음의 개방성을 그 밑자리에 깔면서 이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 이 시대 전도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격려하는 말씀으로 보아 족하다.
차정식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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