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19와 신천지 문제로 인해 이단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한국 기독교이단의 계보와 관련하여 정도교(正道敎)의 설립자 이순화(李順花, 1870~1936)에 대한 문의가 몇 차례 들어왔다. 이로 인해 탁명환 소장이 수집연구하고 「현대종교」가 소장한 1차 자료들을 근거로 정도교와 그 창교자 이순화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한다.
정도교와의 만남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필자가 한국교회사 석사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때, 선친 탁명환 소장이 이순화의 정도교에 대한 연구를 권했다. 그 이유는 첫째, 계룡산의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 중에서 선친이 깊은 관심을 가졌던 단체들 중의 하나였고, 둘째, 정도교의 1차 자료들이 「현대종교」에 잘 보관되어있었으며, 셋째, 일제강점기하 반일 성격의 소종파 운동의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선친의 제안에 따라, ‘정도교’와 함께 박동기의 ‘시온산제국’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고, 『일제하 한국기독교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의 사회·지역적 배경 연구』(연세대학교 대학원, 1991)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아마도 이때부터 필자가 본격적으로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이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사에서 이단문제의 숲을 바라보는 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큰 배움이었다.
▲탁명환 소장과 정도교 교주 이순화의 후계자인 아들 진영수 (뒤편에 녹십자기와 태극팔괘기가 보인다) |
이단의 계보, 그 중요성과 한계
한국 이단의 역사 안에는 계보가 존재한다. 이단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전북대 철학과 교수였던 이강오 교수는 한국 신흥종교운동연구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신흥종교총감』(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에서,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의 계보를 ‘통일교(문선명)’ ‘전도관(박태선)’ ‘여호와새일교단(이유성)’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 유병언)’ ‘안식교’ 등의 계열로 분류해 설명한다. 이는 그의 제자였던 탁명환 소장과의 공동연구에 따른 결과였다. 물론 조사가 완료된 1990년대 이후에는 분류가 어려울 정도의 복잡한 분파 형성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한국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들 혹은 이단들에 대한 연구는, 그 혼합주의적 성격과 차별성으로 인해, 이단의 규모나 흐름을 수치화하거나 도식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맥이나 조직의 흐름은 중요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다문화사회로의 진입 등 각각의 종교사회적 배경에 대한 차별화된 분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일한 단체라 하더라도 종교사회적 배경과 시기에 따라 교리 및 활동 양태를 달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혼합주의적 신흥종교로서의 정도교
이순화의 정도교는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1924년 계룡산 신도안에 정착한 이후로는 정감록과 도참사상이 혼합된 ‘신흥종교’로 변형되었다.
이순화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다섯 살 된 아들의 병 고침을 경험하고 나서부터이다. 한 부인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아들의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하던 중, 아들이 병 고침을 받았다. 이후 이순화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고 기도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이순화의 나이 48세였던 1917년 3월 9일 계시 체험을 하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계시를 통해 세계통일평화와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녹십자기와 세계정돈 평화시대를 의미하는 태극팔괘기를 받았다고 한다. 정도교에서는 이순화를 “천신의 명을 받은 인신”이며 “만민구주”로 믿었다. 정도교의 “하나님의 친정성과 절대성 원리로 천국건설”이라는 유인물에 따르면, 정도교의 교의(敎義)는 다음과 같았다.
“본 정도교 중심교의는.... 유일한 지상천국을 건설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한편 본교 창업주 이순화씨 즉 代天主께서 목적하신바 세계인류 동포의 최종목적인 유일한 지상천구 신시대 인간낙원을 건설과 함께 천국복락을 세계동포가 다 같이 누리도록 할 오직 하나의 교의인 것이다.”
항일 소종파운동으로서의 정도교
주목할 점은 정도교 이순화가 반일운동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이다. 1919년 음력 6월 29일, 하늘의 계시를 받은 이순화는 서울 동대문에 녹십자기와 태극팔괘기를 걸고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것이다. 이순화의 예심종결결정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 피고 사건에 대하여.... 피고 이순화... 등은 예수교 신도로써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또 이것을 고취한 목적으로 대정 8월 7일... 구 한국 국기와 비슷한 팔괘기, 십자기... 깃대를 세우고...”
아들 진영수와 함께 옥에 갇힌 이순화는 서대문형무소에서 10개월간 문초를 받았는데, 취조관 앞에서는 당당하게 “일본은 망한다” “천황은 유황불못에 멸망 받게 될 것이다”라고 외치며 모진 고문을 견뎠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대규모’ 공교단들이 신사참배의 길을 걷는 동안, 거침없는 반일운동을 전개했던 ‘소규모’ 신흥종파 정도교의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결국 이순화는 보안법위반 등의 혐의로 3년 6개월의 수형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출옥한 후 1924년에 계룡산 신도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순화는 음력 1월 26일 6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정도교 후계자 진영수의 반일운동
이후 이순화의 아들 진영수가 뒤를 잇는다. 하지만 진영수는 1938년 다시 보안법위반으로 투옥된다. 총독부의 “민족주의 운동 관계 검거표”(1938)에 따르면, 진영수의 혐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진영수는 전 정도교의 교주 이순화의 장남인데 이 종교는 교세가 부진해져서 교주가 사망한 뒤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사람은 3월에 총독 앞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진정서를 우송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해산된 정도교를 비밀리에 포교하고 조선독립을 고취했다. 특히 중일전쟁이 터지자 본부에 수십 명을 모아 놓고 여러 번 전쟁을 반대하는 기도를 했던 자이다.”
총독부에게는 정도교가 반일단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정도교 법문』에 따르면 이들의 반일적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4. 조선 민족에게 통문인 바 독립운동을 하라 위로하심"
"17. 일본 민족에게 통문인 바 일본 권세도 걷우었다 하심"
"19. 독일국에 대한 통문인 바 전쟁하지 말라 하심"
"34. 아부지께서 일군을 택하시어 독립운동을 재촉 하심"
흥미로운 사실은, 고 탁명환 소장이 정도교에 대한 연구결과를 「성별」(1973.9)에 발표했는데, 이를 근거로 이순화의 자손들은 보훈처에 신고하여 독립유공자 가족으로 지정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 뿌리를 둔 혼합주의적 신흥종교운동으로서의 정도교
이단의 성격 규명은, 본질적 교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기독교계 이단들은 성경으로부터 취사선택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단어와 표현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연관성을 판단하기는 조심스럽다. 교리상의 비교분석 및 실제적 관계성을 기초로 그 계보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순화의 정도교는, 일제강점기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단체이며, 일제강점기 전형적인 소종파적 성격을 노출하며 항일적인 교리와 실천을 하면서, 계룡산 신도안 ‘그들만의 작은 왕국’에서 살아갔던 ‘기독교계 신흥종교운동’으로 분류될 수 있다.
[참고문헌]
이강오. 『韓國新興宗敎摠監』. 도서출판 대흥기획, 1992.
정도교. 『정도교 법문』. 대전: 정도교총본부, 1967.
. 『정도교 성가』. 대전: 정도교총본부, 1967.
정도교총본부. “하나님의 親政運과 絶對性原理로 天國建設.” (유인물).
탁명환. 『한국의 신흥종교』. 제3권. 서울: 한국종교문제연구소, 1974.
탁지일. 『일제하 한국기독교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의 사회·지역적 배경 연구』. 미간행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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