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정치적 신념과 지나친 종교적 믿음이 어우러지게 되면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매트릭스, 진짜와 가짜의 세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은 디지털 신호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이며, 우린 그것을 진짜처럼 믿고, 잠들어 있는 동안 시스템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는 배터리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영화 <매트릭스>. 매트릭스는 자궁을 뜻하는 용어로, 영화 속의 배경이 되는 가상공간을 가리킨다. 영화는 두뇌 속의 기억을 조작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컴퓨터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들 간의 대결을 그렸는데 당시 엄청난 흥행이 됐으나, 문화사역자나 종교인들에겐 논란이 컸다.
중학교 1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나이키’라는 신발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전엔 보기 힘들었던 한껏 멋 부린 신발과 이후 그것과 흡사한 짝퉁들을 처음 맞댄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이키’의 짝퉁임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던 ‘나이스’라든지 ‘프로스펙스’의 짝퉁이 분명한 줄 세 개가 그려진 ‘프로세펙스’같은.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짝퉁들도 뭔지 모를, 나름의 진지한 구석은 있었던 것 같다. 여하간 그 일은 여태껏 늘 회자하고 있는 ‘가짜를 통한 진짜의 확신’에 관한 공식을 품게 했고, 선친의 사역까지 이해할 수 있었던 하나의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매트릭스>란 영화가 예전의 기억을 조금 업그레이드해서 다시 고스란히 수면 위로 올려 줬더랬다. 누군가의 말처럼 성형수술이 유행하고, 몸에 걸친 브랜드가 몸 자체보다 중요해지고, 광고를 보고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상품을 보고 광고를 사는 세상이 되었다.
여기엔 종교도 당연히 예외일 수가 없다. 이렇듯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현상을 프랑스 언어로는 ‘시뮬라시옹’이라 한단다. ‘시뮬라시옹’은 가상현실을 말하는데(영어로는 시뮬레이션) 예컨대 지금의 세계를 가상 세계로 그리는 측면을 기호라는 개념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자. 기호가 있고, 실체가 있다고 가정해보고 기호와 실체는 동일시 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기호가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접하는 것들은 기호인 경우가 많고, 그러한 기호들을 실제 세계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인식을 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호로 구조화된 세계가 실제 세계보다 더욱 실제적 영향을 발휘하게 되고, 그러한 세계를 가상세계라고 부르게 된다는 요지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뉴스로만 접하게 된다. 중국에서 코로나가 발생했다면 뉴스를 통해서만 그 사실을 접하게 되고, 인식하게 된다. 거기서 어떤 왜곡이 있다 해도 왜곡된 것으로만 인식하게 되고, 왜곡된 인식은 거꾸로 현실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세계가 현실 세계보다 더 강한 규정성을 갖게 되고, 가상세계가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결국 현실 세계라기보다는 가상세계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바로 실체보다 기호가 더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철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주장이 된다. 이 내용으로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의 실제와 본질은 분명히 잘못되었는데도 기호, 즉 그들의 경전이나 교주의 메시지, 그리고 교주를 따르는 이들의 나름대로 과학적인 설득을 신뢰하고 좇다 보니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세뇌되고 그 가상의 것이 현실의 것을 앞서 아무리 현실적인 방법으로 설득하고 이해를 구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매트릭스 안에 있는, 이단에 속한 이들은 매트릭스 밖의 현실 세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가 속한 곳이 진짜라 여기고 있어서다.
영화에서 시온의 인간들은 기계들에 맞서 인큐베이터에 갇혀 허상의 세계를 사는 이들을 해방하려 한다. 그 수단은 매트릭스 내에 해킹으로 몰래 접속해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허상임을 깨닫도록 가르치고, 깨달은 자들을 매트릭스로부터 탈출시킨다. 허상임을 깨닫도록 가르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희생에 의한 타인의 회생이라는 기독교적 관점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물론 정통의 기독교적 관점보다는 뉴에이지의 영향이 좀 더 강하지만) 결말처럼 많은 이단에 속한 이들이 가짜를 깨닫고 진짜인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꿈을 꾸고 있으나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세상에서는 그것이 쉬워 보이진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애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싸우고 있는 ‘이유’다.
✽ 처음으로 이름 석 자를 내건 책을 준비 중이다. 내용을 정리하다가 칼럼을 통해 미리 소개했으면 하는 글이 있어 오래전 칼럼을 조금 다듬어서 소개한다.
시기
‘한국교회가 전광훈을 키웠다’는 이야기에 동의한다. 다만 비판의 시기가 많이 늦었다는 것이 문제다. 올 초 코로나와 신천지가 맞물려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모든 국민이 신천지 전문가가 된 양 관심이 매우 컸다. 기독교인에게만 익숙해 있던 신천지는 그렇게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 누구 하나 쓴 소리를 내어놓지 않은 이들이 없었는데 ‘이단 문제는 밥 먹고 할 짓 없는 이들이나 파고드는 거’라고 비아냥대던 몇몇 교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데자뷔인가? 그때의 사건이 단체만 바뀐 채 다시 발생했다. ‘사랑제일교회 발’ 사태(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앞은 이단이고, 뒤는 일반교회다. 그러나 최근 여론은 사랑제일교회가 신천지보다 못하거나 이단보다 못됐다는 의견이 더 많다. 더불어 전 목사의 주변 이야기들도 꽤 들려오고 있다. 같은 목적을 안고 가던 이들이 전 목사가 궁지에 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쳐내다시피 모른 척하다가 파편이 더는 튀지 않음을 확인한 후에는 대중과 같이 쓴소리를 퍼붓고 있다. 역겹고 구차하다.
그것이 정당(정치인)이든 교회(목회자)든 간에. 반드시 극우의 상징이 된 전 목사와 함께한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불가근불가원’ 했던 교계 인사들까지 회개와 반성이 있기를 바란다. 이후 같은 일이 더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며, 정치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각 교단 총회에서 (전 목사에 대한)이단 옹호든 이단성이든 간에 분명한 규정이 마련되어야 함도 물론이다.
어떠한 사건과 문제가 터지기 전에 의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동안 늘 반대의 것만 봐와서 그런지 기대하기가 쉽진 않다. 그러나 소수이긴 해도 교회와 사회 내 양심 세력은 늘 존재해왔고, 그간 꾸준히 의로운 목소리를 내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이지 않나 싶다.
예언자적 소명은 이렇듯 늘 외롭고, 의로우며 시기의 적절함을 통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분의 계시이든, 내지는 세상 민초의 삶을 통해 깨달아서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역사의 소용돌이가 되풀이되는 동안 의롭게 문제를 풀어간 이들 역시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 싶다.
그 등장에 거룩한 분노와 부담감을 안고 함께 해야만 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숙명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소중한 것은 열 사람의 한 걸음이기 때문이고, 내가 빠지게 되면 그도 빠지고, 내가 나서게 되면 그도 나서게 되는 것이 삶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국가나 사회가 시끄러울 만큼 못된 짓을 한 인물이 나오기만 하면 (종)교인이다. 교계에서는 목사가 많았던 것 같고(열심히 살아가시는 대부분 목사님께는 죄송하나).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던 몇몇 대형교회는 물론이거니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예장합동의 종교 브로커 김규로부터, 예장통합의 황학, 이어 예장대신 출신의 전 목사까지. 그릇된 소신과 신념이 교회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까지 어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글을 쓰고, 이 같은 책을 내며, 이같이 오랜 기간 이 사역에 매진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이다.
✽ 전 목사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왔던 ‘사랑하는교회’와 변승우씨는 이즈음 무얼 하고 있을까. 여전히 전 목사와는 잘 지내왔는지, 전 목사에 관한 입장은 어떤지, 궁금하기만 하다.
아픈것이 집회 취소때문만이 아니라니까요
9월 전후로 그나마 잡혀 있던 강의가 대부분 취소됐다. 2월에 시작된 강의 취소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중간에 조금 뜸해지는가 싶었는데, 다시금 확산세가 이어지며, 8개월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전화벨만 울려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상반기는 신천지로 인해, 하반기에는 사랑제일교회 발 발병이 주요 원인이었기에 이 두 곳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화가 나서 잠을 깨곤 한다. 작금의 상황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지 않겠냐며 스스로, 내지는 타인들에게 말했던 믿음이 점차 느슨해지고 있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선친의 소천 이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나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난번엔 우리만의 아픔이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으나 이번엔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문을 닫는 개척교회들과 소상공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피부가 벗겨 질 만큼 소독을 하며 방역만큼은 누가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했으나 결국 운영이 중단됐다는 PC방 업주의 아픔이나 소고기를 200인분 준비하며, 숙성시키는 것까지 4~5일을 고생했는데 예약이 모두 취소되어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고깃집 사장의 이야기는 그나마 가벼운 사연에 속한다.
소규모 교회들과 업주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상황을 들을 때마다 본지의 상황과 맞물려 급격히 우울해진다.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이 상황이 언제쯤 멈춰질지, 전혀 알 길 없으니 그저 원점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소망하고, 또 소망할 뿐이다. 비참하고 우울한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여전한 강의 초청자들의 무례함 때문이다. 칼럼(밑의 글 참고)을 통해 전한 바도 있으나 한 번 더 언급하지 않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집회를 잡았음에도 아예 연락이 없는 곳도 부지기수이고, 몇 번이나 취소의 결례를 범하고도 코로나 탓만 하며, 사과 한마디 없는 곳을 포함해 강행이든 취소든 간에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락조차 주지 않으니 실망을 넘어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집회 관련해서는 예의와 배려가 참으로 중요하지 싶다. 서로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렵게 잡은 집회가 ‘초청은 간절하게, 그리고 취소는 간단하게’ 이뤄지면서부터 든 생각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예의와 배려를 갖춰줄 수는 없을까. 물론 잘 알고 있다.
코로나19로 힘에 부치는 일이 많(았)기에 그랬다는 것을, 천재지변의 일로 인한 집회 취소는 그래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취소 연락을 달랑 문자 한 통, 이메일과 전화 한 통으로 끝내버리는 것에는 착잡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조금이라도 일찍 결정해주는 배려와 더불어 손님으로 초청한 것이니 바쁘고 어렵더라도 담임 목사 등 대표되는 이들이 연락을 줘서 정중한 취소의 변과 더불어 ‘우리 교회도 힘드나 현대종교는 얼마나 어렵고 힘들겠는가?’라는 위로와 격려, 기도의 마음이라도 나눠줬다면 이렇게까지 속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하게는 강의 사역을 밥그릇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어찌할까. 어찌해야 하는가.
늘 적지 않은 상담과 도움 요청에 성실히 응해왔고, 사역하면서 어떤 요청에도 웬만해선 거절치 않으려 노력했던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지며 왠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다.
매달 넋두리가 점점 느는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나 이 지면마저도 그러한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면 속이 터질 것만 같으니 부디 양해를 구한다(글을 마칠 즈음 모 교회에서 집회 취소에 관한 아쉬움을 전하며, 미안한 마음을 후원으로 대신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 같은 상황은 처음이지 싶다. 감사한 마음이 큰 것은 당연히 후원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 넋두리가 전부였다면 아예 처음부터 이 사역에 뛰어들지 말아야 했을 테니 다시 마음을 다잡아보는 것이 이번에도 변함없는 결론이 될 것 같다.
강의 사역의 이유가 교회와 성도를 위한 정보의 나눔이 전부였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함도 필요할 것 같고. 언제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히 여겼던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은 한 치 앞을 알 순 없으나 우선 본지는 각자 직원들이 흔들리지 않고, 그간 해왔던 일들을 그대로 잘 감당하되, 상황에 따라 차선책도 준비 중이다. 특히 본지보다 힘든 곳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며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자 함도 물론이다.
최근 본지에 보내져 오는 섬김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본지는 섬기는 곳들을 포기치 않으려 하며, 더욱 주변을 살피고자 한다. 코로나가 끝난 이후에 지금의 시간을 회상할 때 포기했던 것들로 인해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이유’ 때문이다.
건강한 정치적 소신과 건전한 종교적 믿음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정치가 잘못 갈 때 교회는 그것을 바로잡아 줘야 하나 그렇다고 교회가 정치에 앞장서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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