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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의 주장과 성경적 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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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목사 mrmad@hdjongkyo.co.kr
2016.03.18 17:33 입력 | 2016.03.18 17:44 수정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의 주장과 성경적 반증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62길 18에 위치한 기독교복음침례회 서울교회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의 주장과 성경적 반증
▲ 정동섭 목사
본지 편집자문위원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한국에서 구원파라고 불리는 곳은 크게 세 단체가 있는데,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 유병언), 생명의말씀선교회(이요한, 대한예수교침례회), 기쁜소식선교회(박옥수, 대한예수교침례회)다. 이번 호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리를 반증한다. 편의상 본문에서 기독교복음침례회를 구원파로 표기했다. (편집자 주)

유병언씨(사망)와 권신찬씨(사망)로 대표되는 구원파는 깨달음에 의한 구원, 회개 무용론, 율법에 대한 오해, 죄인-의인문제, 임박한 종말론 등과 관련해 기독교성결교회(1985),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1991),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1992),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2008) 등 주요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필자는 8년 동안 구원파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성서관, 신관, 구원관, 기도 및 예배관, 교회관, 종말관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르침이 왜 “다른 교훈”, 즉 “멸망케 할 이단”(벧후2:1)에 해당하는지를 차례로 반증하려한다.

1. 구원파의 성경관
구원파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구원파의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사사로이 억지로 해석하는데 있다. 이단논쟁은 결국 성서해석학적 논쟁이다. 정통교회는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딤2:15), 이단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한다(벧후3:17). 구원파의 지도자 권신찬씨와 유병언씨는 체계적인 신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사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이단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우화적, 풍유적으로 영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유씨는 구원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구원파를 떠나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14장 6절을 “나(구원파 교회)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해석하며, 요한복음 15장 4~5절은 “사람이 포도나무(구원파 교회)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영적으로 고갈되어 멸망한다”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다. 한편 권씨는 그의 사위 유씨와 함께 교제를 강조하기 위하여 말라기 3장 16절을 역사적 배경이나 문맥과 상관없이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일(세모 그룹의 일, 세모 스쿠알렌 등 사업)을 위해 서로 상의하고 의논하는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중요한 기도가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2. 구원파의 핵심교리
지면관계상 유씨와 권씨의 주장을 요약해 제시한 후에 주제별로 이들의 가르침이 왜 비성경적 이단사상에 해당하는가를 반증하기로 한다.

유대인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함으로써 구원받지만 우리 이방인은 죄사함의 복음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사람들이 영을 자기의 인격적 활동과 혼동하여 인격의 일부인 이성이나 감정 혹은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나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은 구원파 교회를 예정하셨고 개인은 예정하지 않으셨다. 모든 종교 행위와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의 진리를 피동적으로 깨달으면 구원받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가 바로 기도이며 예배다. 새벽기도는 한국인의 미신적 종교성의 표현이다. 세계 역사상 새벽기도를 통해 신령하게 된 사람은 없다. 손으로 지은 교회는 필요 없다. 교회의 참 모습에 대한 비밀이 구원파에서 처음으로 깨달아졌다.

⑴ 하나님관과 기도, 예배관 반증
구원파 지도자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사상과 행위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다(딛1:16).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권씨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만이 기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며 기도가 불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구원파 교인들은 기존교회의 통성기도를 “청개구리의 울음소리”라고 비웃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한 사람의 기도밖에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모든 정통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간다”(엡2:18). 그러나 구원파 교인들에게는 삼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유씨는 예수님을 교회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교회를 “성령의 몸”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을 구분하는 것이 구원파 지도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권씨와 유씨는 기성교회의 새벽기도, 통성기도, 금식기도, 축도를 경시한다. 기도와 예배를 무시하는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인생에 복을 주는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구원파 교회를 예정하시고 인도하실 뿐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한국인의 미신적인 종교성의 발로가 아니다. 예수께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고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눅6:12, 9:18, 11:1). 성경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 차있다. 기도는 성도들에게 호흡과 같은 것이다(엡3:12; 빌4:6; 히4:16). 유씨는 소속 교인들끼리 모여 “사업을 의논하는 것”이 교제이며 기도라고 가르치는데, 교회사에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억측이며 궤변이다.

구원파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권씨나 유씨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세계역사를 주관하시는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영으로 부각하고 있다.

권씨는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정의를 지닌 인격으로 회개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구원파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그들의 신학사상과 언행으로 삼위 하나님을 부인한다.

(2) 구원관 반증
구원파에서는 모든 교리가 구원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권씨와 유씨는“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깨달음에 의한 구원”, “율법과 종교에서의 자유(해방)”를 강조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들 구원지상주의자들에게 ‘구원파, 깨달음파, 중생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구원파의 전도방법을 살펴보자. 이들은 기성교회 성도들에게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거듭났습니까?”라고 접근한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이 모두 헛수고였음을 고백하게 한 다음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하게 한다. 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 죄사함과 관계되는 구절(예: 히9:12)을 계속 제시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은 것”을 깨닫게 도와준다. 이와 같이 어느 순간에 죄사함을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인정해 준다. 이때부터 전도 받던 남녀는 “구원받은 형제자매”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구원파 지도자들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죄책과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 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주장이다. 아담의 원죄를 예수님께서 단번에 해결하였으니 이를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구원관에 빠져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의지적인 회개이다. 성경적인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심은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구원파에서는 죄사함을 깨달으라고만 다그치지 정통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예수께 나오라”(마11:28),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행2:38, 16:31), “예수를 영접하라”(요1:12)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씨와 유씨는 빌리 그래함이나 김준곤 목사, 한경직 목사를 구원받지 못했다고 공언한다. 깨달으라 하지 않고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라, 주님 앞에 나오라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구원관이 서로 다른 것이다.

구원받은 날짜, 시간과 장소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조용히 주님을 따르라는 부름을 받을 수도 있고 바울처럼 극적인 회심을 하기도 하고, 디모데와 같이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 가운데는 구원은 받았으나 언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는지 그 날짜와 장소를 말할 수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활동하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3:22~26). 그러나 신분상으로, 법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지 실제로 죄가 없는 의인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으로 여전히 죄를 짓는다. 이제는 자녀로서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명령하셨다.

(3) 교회관 반증
구원파는 다른 이단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교회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참 교회라는 배타적인 교회관을 갖고 있다. 유씨는 “천주교, 감리교, 성결교, 장로교 등 어느 교파에도 복음은 존재하지만 그곳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교제”라고 모순적이며 독선적인 견해를 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권씨의 주장을 들어보자. “기독교 역사가 내려오면서 많은 기독교 학자와 신앙인들이 지은 책을 읽어보았다. 그 책을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에서 발견해 내고 깨달아지는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 참 교회의 모습을 정립해 놓은 글이 없다”, “교회의 참 뜻은 성경 속에 특히 비밀히 감추어져 있는 진리로서 기독교 2000년 역사상 이 진리가 나타난 것은 극히 드문 일로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다. ··· 현재는 한국의 시대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령이 구원파에서 집중적으로 역사한다는 확신이다. 정통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지만, 구원파는 교제하기 위해 모인다.

“개인은 죄사함의 경험이 있을 뿐이다. 성령이 계신 곳은 교회이다.”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모든 생활의 구심점은 교회, 즉 사업체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전개이다. 신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4) 종말관 반증
구원파는 극단적인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한다. 권씨는 “신약은 서기 70년부터 1900년간이 이방인의 때이고, 다음 환란의 7년간과 주님 재림 후 1000년간의 평화의 기간으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설교집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 및 회복, 666, 적그리스도의 출현, 유럽경제공동체(EEC), 세계정부의 실현가능성, 예루살렘성전의 재건을 계속 거론하면서 재림이 임박했음을 설교하고 있다. 권씨는 성령이 구원파 형성 초기에 유씨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마지막 시대의 ‘입’으로 세우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중심메시지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환란 전 휴거설을 전하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다. 그 가르침의 동기와 목적이 잘못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3:11~14). 구원파는 종말론을 가르치는 목적과 동기와 내용이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서 크게 탈선하고 있다.

구원파는 이단이다. 구원파의 이단성은 그들의 성경관, 신관, 인간관, 구원관, 기도와 예배관, 교회관과 종말관에 고루 나타나고 있다. 교회사와 조직신학, 성서해석학에 대해 무지한 구원파의 지도자들은 성경을 우화적으로, 임의적으로 영해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구원파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던 초대교회 당시의 영지주의(Gnosticism)가 현대판으로 재현된 것이고,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회개할 필요 없이 은혜를 누리자는 율법폐기론(반율법주의: antinominianism)이 다시 나타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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