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는 강약(强弱)과 대소(大小)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 한다).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당성의 획득도 서지 못함은 물론이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있었던 폭행 사건이라든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를 향한 국가적 폭력까지 어떠한 경우라도 물리적 폭력이 문제의 대처나 대응이 될 수는 없다.1. 매스컴을 통해 하루에도 수없이 보도되는 ‘폭력’에 대해 울분을 토할 때가 많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늘 이단 관련한 폭력문제 외에 다른 무언가에 깊은 관심을 둔 적이 많지 않았더랬다. 5월이 되었으니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가정과 이단 관련한 문제를 다뤄보고자 했으나 그래도 한 번쯤은 위의 주제도 들여다봐야 할 필요를 느껴 칼럼 내용을 전면 수정했다. 어떠한 문제에 대해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무를 넘어 숲 전체가 보이기도 하고, 크고 작은 놀라운 것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아울러 문제의 대응도 마련될 테이나 그것들을 간과한 적 많았기에 이번만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글을 써보기로 했다.2. 여러 폭력 중, 가정 폭력은 그 수위 등이 대중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한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서의 원인이 더욱 크다고 한다. 교회 폭력 역시 사회 상황과 문제가 배경이 되는 경우가 많고, 얼마 전 8주기를 맞은 세월호 참사도 단순한 사고가 아닌 국가와 사회의 또 다른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것도 대충 살펴봐서는 해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 좀 더 넓고 깊게, 그리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까지 면밀히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 폭력은 작고 큰 것으로 나눌 수 없으며, 가장 극악한 폭력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아이들의 ‘장난과 폭력’은 종이 한 장 차이처럼 보이기도 하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최근엔 물리적 폭력보다 언어적 폭력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폭력의 실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이해관계’이며, 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더불어 폭력의 목적은 폭력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기에 가장 극악한 폭력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빼앗는 것’이라고 작가 김규항은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라는 저서를 통해 말했다. ‘가장 극악한 폭력’은 폭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들조차 모두 다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일 텐데, 이미 이단들의 특징으로 여러 번 경험했던 바다.아이들 세계에서의 폭력도 어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다. 중요한 것은 장난과 폭력의 구분 점인데 청소년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장난은 장난을 친 사람과 장난을 받은 사람의 이해구조가 같이 형성될 때 장난이 되는 것이며, 서로에게 신체, 정신적 피해 없이 어떤 행위가 심하게 가해지지 않는 선에서 장난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한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상대방이 싫어하게 되는 경우 그때부터 폭력이 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제가 상상하지도 못한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하여 개인적으론 그동안 살면서 부딪혀온 수많은 문제의 대처 때마다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저항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공적으로는 도처에 만연해 있는 폭력의 문제를 풀기 위해 누가, 어떤 대안을 고민하고 지혜를 모으며, 실천하고 있는지를 되짚어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3. 본지도 어느 정도는 고민하던 부분인지라 이번 지면을 통해 좀 더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 (이단의 폭력 관련해서는 그간 자주 소개했었으니) 교회 폭력에 관해서다. 이 문제 역시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간 생각했던 방향과 해답의 지점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이단 발생의 원인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먼저 교회 폭력의 최고점에 있는 교회의 분열과 관련해서는 세상에서조차 쉽게 볼 수 없는 조직 간 물리력의 대치와 성도들 간의 폭력으로 점철되는 문제이다. 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 속에 담긴 사랑과 화해는 찾아볼 수 없었고, 선택한 쪽만을 맹신하며 반대하는 이들에겐 무조건적인 이단과 사탄의 철퇴를 씌우곤 했다. 불행히도 이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외 교회의 성폭력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생각지 못했던 남성폭력과 최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 담임 교역자의 권력을 앞세운 부교역자들에 대한 폭력(언어폭력 포함)까지 더해져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지도자와 리더들이 성도들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고 독단, 독선적인 사고로 말씀을 전하거나 불합리하게 교회를 이끌어 갈 때, 그리고 예배 외 평소의 언행과 삶이 결코 성경적이지 못하거나 상식적인 이해조차 구하지 못할 때 그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 되고 만다.반대로 성도들의 교역자를 향한 상식적이지 못한 언행과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세습이든 또는 교회 재산과 관련해서이든, 그리고 성적인 추행(폭력) 내지는 언어폭력과 법을 간과한 직원 등의 해고 문제 등과 관련한 현재의 산적한 문제들이 어쩌면 한국 교회의 포스트 코로나 계획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결국 학교폭력과 가정 폭력에 관해서도 교회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본지 이사장인 탁지일 교수도 작년 모 방송에서 신앙심 뒤에 숨은 폭력, 종교적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에 대해 소개하기도 했더랬다.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깊게 산재해 있는 폭력의 문제가 교회에만도 이리 많으니 세상의 것들과 더불어 노출되지 않은 것까지 합친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을까 싶다. 이단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임이 틀림없다.4. 교회뿐 아니라 언론의 공정과 정의도 돌연 폭력으로 탈바꿈되어 버리는 일들이 적지 않기에 세상 것 중 어느 하나라도 현상만으로 본질을 유추하기가 어렵고,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도 쉬이 밝혀내거나 찾아내기가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처음에 밝힌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쓰기는 했으나 역시나 우리가 소망하고 꿈꾸는 것들이 인간의 연약한 지혜와 노력만으로 답을 찾기엔 무리가 있다는 결론이다. 실천의 첫걸음조차 딛지 못하고, 오랜 숙제가 될 것도 분명해 보이고. 그저 미약하나마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각각의 폭력과 부당한 문제들을 놓고 기도하며, 늦게나마 마중물의 역할로 대처와 대안을 함께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부족한 마무리이긴 하나 코로나 대처와 이단 대처와 같은 선상에 이 문제를 놓고, 한 번 더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그런 작은 마음이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을 뛰는 심정과 노력으로 이어진다면 언젠간 반드시 결승점에 도달하고야 말 것이라고 믿는다. 역사가 보여주듯 세상은 꿈을 꾸는 사람들로 인해 바뀌어왔다. 그러나 그 꿈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그 꿈이 불가능한 꿈이었는지는 모르나 결국 그렇게 바뀌었다. 이번의 문제 제기와 소망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으나 반드시 이뤄질 귀한 꿈이 될 것이라 이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최근에 불거진 여러 폭력의 현장을 접하며, 이번 달 허락된 지면에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담아봤다. 이렇게라도 해야 덜 비겁할 것 같아서이다. 어렸을 적 자주 불렀던 찬양의 가사이기도 한 아래의 말씀처럼 반드시 이뤄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작금의 고단한 날들을 기쁘게, 그러나 거룩한 부담감을 안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물심양면으로 서로 돕고 섬기며,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해 마지않는다.‘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중략)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 이사야 35장 1~10절 -’폭력에 대해서 그저 ‘안 됨’으로만 끝낸다면 본질과 근본이 소거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지금 당장 시급하게 말뿐 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폭력에 대처하고 세상을 바꾸는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때로는 자신을 망가트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Copyrights ⓒ 월간 「현대종교」 허락없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